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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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작가 100인이 선정한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은 세르반테스(1547~1616)의 <돈키호테>라고 합니다. 조금은 엉뚱한 이상향의 꿈을 품고 우스운 기사가 되어 좌충우돌하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책에서 돈키호테는 다음과 같은 심오한 말을 합니다. <행복한 시절, 행복했던 수세기를 황금시대라 이름 붙였던 이유는 오늘날 이 시대에 높이 평가되는 황금이 복된 그 시기에 쉽게 구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사람들은 ‘네 것, 내 것’이라는 두 단어를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었소. 저 성스러운 시대에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지요. 그 누구라도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달콤하게 익은 열매를 아낌없이 주는, 잎이 무성한 떡갈나무에 손만 뻗으면 되었소이다. 맑은 샘물과 흐르는 강물은 사람들에게 맛 좋고 투명한 물을 충분히 제공해주었지요.>

세상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 이를 우리는 기쁜 소식, 복음이라 부릅니다. 어느 한 사람이나, 한 민족만이 배부르고 등 따스한 안락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살아가는 게 하느님의 바람이셨습니다. 그 같은 일이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고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몰이해와 비웃음이 쏟아진다 해도, 때론 돈키호테 같다는 핀잔을 듣더라도 끊임없이 그 길을 걷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가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복음 선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선포하는 게 아니라 실현 가능한 꿈을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 본연의 사명인 선교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며 실천을 다짐하는 전교주일입니다. 1922년 비오 11세 교황의 교서에 의해 제정된 전교주일은 1926년부터 전 세계 교회로 확장되어, 현재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Mt28,19~20)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명에 따라 우리는 세상 끝까지,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는 해외에 파견된 선교사들만의 일이 아니기에, 우리는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그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고 활동하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이웃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활동하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교 곧 복음 선포가 교회 본질이라면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위한 첫째 방법은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증거입니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여 식민지 통치를 할 때, 영국군 장교들의 모임에 초청을 받은 간디는 연단에 올라가 영국군 장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이 가는 곳마다 십자가가 달린 교회를 짓는데, 당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건물이나 선전 벽보가 아니라 당신들의 삶으로 예수를 보여 주시오. 당신들이 믿는 예수가 부당하게 폭력을휘두르며 살인하라고 가르쳤습니까? 당신들의 예수가 나약한 여인들을 겁탈하라고 가르쳤습니까?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약탈하라고 가르쳤습니까? 내 조국 인도를 그냥 놓아두시오! 당신들의 예수가 아니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싫습니다> 영국군은 교회를 짓고 벽보를 붙이며, 온갖 말로 그리스도를 전했지만, 간디의 말대로 그리스도를 보여 주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그릇되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인도에 마더 데레사가 갔었지요. 데레사 수녀는 아무 말 없이 가장 가난한 도시 캘커타의 빈민가에 들어가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데레사 수녀는 교회도 짓지 않고 십자가도 세우지 않고 벽보도 붙이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삶으로 보여 주었을 뿐입니다.

현대의 복음 선교 회칙 41항을 보면,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위한 첫째 방법은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표양이다. 끊을 수 없는 하느님의 친교로 봉헌하고 동시에 무한한 열성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생활의 표양은 복음 선교의 첫째 수단이라고 인정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내가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의 삶을 사는 것이 전교이며 복음화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비’와 ‘사랑’입니다. 그것을 사는 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려고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교가 가능할 것이며 복음화되겠습니까? 우리 삶의 모습이 전교의 기반이며 복음화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듣기보다는 우리의 행동을 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이미 복음화된 것이고 그런 상태가 진정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 복음을 복음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예전 저는 베트남에 파견되어 처음에는 공안들의 감시 때문에 국제공동체에서 생활하다가 이내 베트남 학생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제가 파견되기 전까지 외국 선교사들은 국제공동체에서, 벳남 학생들은 베트남 공동체에서 생활해 왔었는데, 처음으로 제가 벳남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함께 살면서 저는 제 은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여러 가지 일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양성자들과 함께 심신지체장애인 공동체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청소와환자 목욕시키는 일 그리고 경제적인 지원도 하였습니다. 또한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을 선정해서 학비 지원 사업, 두 곳의 마을에 우물 파주기, 시골 학교에 중고 컴퓨터를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단지 장애인들과 가난한 이웃, 그리고 학생들을 돌보는 일만이 아니라 앞으로 벳남에서 예수고난회원으로 살아갈 양성자들에게 중요한 교육 기회였고, 복음 실천의 중요성을 자각시키는 일이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선교사로 살면서 베트남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베트남 형제들과 함께 복음적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실천했던 그 모든 작은 일이 지금은 서품과 서원한 그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실천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나갔다.>(로10,18)

우리는 많은 성인 특히 우리 시대에 마더 데레사 성녀처럼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 주변의 이웃, 직장, 모임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작은 사랑을 실천해도 감동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보다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모습이 사람들에게 더 큰 감명을 주고 영향을 줍니다. 참다운 전교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행복한 삶을 보여 주는 게 가장 훌륭한 복음화라고 봅니다. 따라서 복음화와 사랑은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화 곧 전교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실천합니다. 주님의 존재와 그분의 말씀 자체가 사랑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지닌 복음의 기쁨을 전하고 나누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주님께로 이끄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우리 때문에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우리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의 행복도 더 커질 것입니다. 나만 믿고 구원받는 신앙인이 아니라, 적어도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 단 한 명을 위해서라도 기도하고 인도하는 사람이 참 신앙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10,15)라는 바오로 사도의 찬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이 닿는 곳에 사랑이 닿는다>라고 하셨던 교황 바오로 6세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입이 하느님을 선포하고, 나의 눈이 사랑을 말하게 하며, 나의 손이 이웃의 손을 잡고서 예수님께 이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여러분은 선교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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