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21.12.09 18:46

대림절 특강 2: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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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주 즐겨 표현하는 애벌레의 비유입니다. 애벌레에게는 길에 늘어선 모든 것이 다 문제입니다. 앞에 있는 돌덩이도 문제고 냇가도 문제고 막대기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비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구경거리입니다. 하지만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지요. 고통을 통해서, 자기 죽음을 통해서... 그렇습니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삶은 느끼고 경험해야 할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삶을 신비로 보는 눈이 열릴 때에 비로소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모든 사물과 세상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사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구원이며 사랑입니다.

 

애벌레가 돌과 막대기를 치워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옳음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지요.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눈뜸, 회심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은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과정이며, 이는 우리가 한번 변화되면 문제나 장애가 모든 것이 다 구경거리로 변한다는 거듭남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는 반복되는 변화(=회심)를 체험합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오면서 변화를 위한 계기는 크게 교육- 고통- 사랑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분명 교육은 우리의 변화를 위한 가장 기본적이며 합리적인 수단입니다. 하지만 장시간이 필요하고 더디게 그 효과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때론 교육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교육은 분명 변화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입니다. 둘째는 고통을 겪고 나면, 아픈 만큼 성장하고 변합니다. 끝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누군가로부터 아낌없이 조건 없는 사랑을 받다 보면 놀랍게 변합니다. 어떤 면에서 성서의 인물들 대부분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영적으로 거듭나신 분들입니다.

 

마르코 8, 22~37에서 베사이다 소경에게 예수님은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습니다. 사람이 그러나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이후에 예수님께서 그의 두 눈에 손을 다시 얹으시자 제대로 보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장소가 주는 낡은 습성에 다시 젖을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새롭게 거듭남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장소에로 나가도록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은 관습이 아닌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제와 다른 자유와 눈뜸, 해방을 주러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장면인 루카 4, 16~19절은 의미로운 시간이자 자리입니다. 이를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 우리는 참으로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는 눈뜸이 필요합니다. 저는 바둑을 잘 두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둑에서 초급과 고수의 차이는 ‘부분만을 보느냐 전체를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수는 눈앞에 있는 것만을 보지만 고수는 바둑판 전체를 보기에 몇 수 이후를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때야 비로소 길이요 진리며 생명이신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있으며, 그러기에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기 위해서 우리 또한 영적 눈이 뜨여야 합니다.

 

눈을 떠가는 여정의 첫 걸음이 바로 순례이며, 진정한 순례는 참된 자신이 되어가는, 제 모습을 찾아가는 여행과 같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예전처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잠시 지금 가고 싶은 곳을 상상하면서 다 함께, ‘여행’이라 외쳐볼까요. ‘여’로부터 시작해서 ‘행’이란 음절까지 입이 계속 벌어집니다. 그래서 여행이 시작하면 첫 순간부터 ‘와우’ 하면서 놀라움으로 시작하여, 시간과 공간이 지나면서 오는 아쉬움 그리고 마침내 길 위에 홀로 서 있다는 외로움이 남게 되지요. 하지만 되돌아와서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남는 것은 기억입니다. 그러기에 여행이나 순례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행은, 특별히 성지순례는 어디로 가는 것이라기보다 어디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 것은 기억과는 무관한 행위입니다. 반면에 되돌아가는 것은 기억할 것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현실과의 충돌에서 자기를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여행은 나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곧 여행은 자신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잃지 않음입니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때 바로써 참된 자기를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를 지나가며, 마침내 어디에 도달하는 여행을 할까요? 이 여정, 순례는 다음과 같은 행선지를 통과하고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특히 이 여정에서 중요한 점은 광야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 여정은 성경의 핵심입니다.

↓ From 이집트 거짓 자아

↓ Through 광야 죽음

↓ Into 이스라엘 참자아

 

 

광야란 단지 지리적 영역이나 장소가 아닌 심리적 차원에서 <우리 각자의 고유한 무의식적인 에너지가 꿈틀 거리는 심층세계>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깊은 심연, 무의식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서 기존의 거짓된 정체성(=사회적인 신분, 지위, 명성)이 가져다준 보호막, 울타리 안에 안주한 채 머물러 버립니다. 자신이 통과해야 할 내면으로 내적 여행을 떠나지 못합니다. 해소되지 않은 치유되지 않은 에너지는 우리의 의식과 행동으로 표출됩니다.

 

광야는 내적 싸움과 투쟁을 위한 장소이며 지금껏 한번도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입니다. 광야를 통과해야 만이 참된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본래의 참된 자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위기의 장소이며 시간이지만, 헛된 목표를 버리고 새로운 방향에로 나가는 과정이며 (=출세욕, 자만심, 눈먼 욕망에서 벗어남), 자기와 대면의 시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자기의 어둠과 상처를 직면하는 고통스런 시간이며 장소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참된 해방도, 치유도 다시 태어남도 없습니다.

 

광야는 거리두기, 즉 익숙한 환경, 고착된 인간관계, 구태의연한 생활 습관, 일상화된 스트레스, 끊임없는 자극과 유혹 등에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는 동시에 거짓된 자아로부터 벗어나 거짓된 환상과 에고에서 깨어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성 바실리오는 이를 자기의 '껍데기‘를 벗어나는 것이라 표현하였습니다. 이처럼 광야는 밑뿌리에서부터 우리 존재를 흔들어 깨우는 곳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광야가 있고 자기만의 내적인 투쟁이 있으며, 그러기에 그 어떤 누구도 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광야는 그러기에 참된 경험, 산 체험, 성장통의 장소이며 시간이기도 합니다. 내가 계획하고 계산했던 모든 것, 나 자신만 생각했던 삶이 덧없이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광야는 시간입니다. 주변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모으는 시간입니다.

 

광야는 끊임없이 물음이 일어나고 답이 뒤따르는 곳입니다. 그 답은 침묵이며, 고독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됨으로써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 소리는 단지 내적 소음일 뿐입니다. 이를 위해, 가속 운동에서 감속 운동으로 전환이 요구됩니다. 곧 ’빨리 빨리‘에서 ’느리게 더디게‘ 이를 통해 우리는 결과만을 중시했던 관점에서 과정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한때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과정을 무시한 채 결과지상주의에 젖어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또한 비움 운동을 할 때, 자연스럽게 채움 운동을 성취하게 됩니다. 사막의 첫 느낌은 아무것 없음無, 텅빔을 느낍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느껴지는 느낌은 꽉 참, 충만함으로 넘쳐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막에서 체험이 너무 강렬했기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막에로 다시 가고 싶습니다.

 

-- ‘우리 시대는 역사상 가장 수다스런 시대입니다. 이 세대는 끊임없이, 쉬지 않고, 발설하고는 있지만 정작 참다운 말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제대로 들을 때, 참된 말이 입술에 올라옵니다. 들음이 전제하고, 침묵과 고독 속에서 들은 말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일화입니다. <이웃 사람이 뛰어왔다. 흥분된 나머지 멀리에서부터 큰소리를 질렀다. ’여보게 소크라테스‘ 자네에게 꼭 할 말이 있네. 자네 친구 놈이 말야.’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당장에 말을 끊고 그 사람에게 하려는 말을 세 가지 체, ’진실의 체, 친절의 체, 필연성의 체‘로 걸러 냈는지 물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자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진실한 말도 아니오. 친절한 말도 아니오. 꼭 필요한 말도 아니라면 그 말은 그저 땅에 묻어버리게나. 그래야 자네나 나나 그것 때문에 괜히 속을 썩는 일이 없지 않게나.‘>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말은 진실함- 친절함- 필연성이 필요합니다.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고 악마와 대적을 통해서 참된 자아와 만남과 화해를 위한 장소입니다.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고 악마와 대적을 통해서 참된 자아와 만남과 화해를 위한 장소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순례는 광야에로 나감이며, 광야에 나가서 깨달아야 하는 점은 자신의 소리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광야에서 들은 하느님의 소리를 외쳐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지붕 위에서 외쳐라!>는 말처럼. 물론 아무도 듣지 않은 척박한 광야에서 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무모하고 보람 없는 일이며 헛수고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소리를 외쳐야 합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노랫방에서 하듯이 말입니다.

 

예전 공주 마곡사를 찾았는데, 마곡사에 머물렀던 김구 선생님의 방 앞에 휴정 서산대사의 선시가 씌여 있더군요.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딋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소리를 외친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미지는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 잘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이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언제 읽어도 참으로 아름답고 의미로운 시입니다. <길이 되는 사람>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길이 되는 사람이고, 되고 싶을 것입니다. 봄길이 되는 사람은 스스로가 모든 가능성을 믿고 단지 사랑으로 묵묵히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겠지요. 그러기에 이사야 예언자의 소리를 광야에서 외친 세례자 요한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었던 분이셨고,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었던 분이라고 느껴집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신 존재였고, <우리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고 외치신 분이십니다. 길이란 본디 두 곳을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 주신 매듭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외친 내용은 이사야 40, 3~5절의 예언입니다.

1) 거친 광야를 기름진 광야로 바꾸라: 마음은 자기 자신과 하느님이 만나는 자리,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자리인데, 생명이 자라지 않은 척박한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밭농사 경우, 새 밭을 일구는 것보다 묵혀진 밭을 다시 일구는 게 훨씬 어렵습니다. 이렇게 한번 굳어버린 마음을 옥답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은 쉽지 않습니다. 살아 온 삶의 시간을 통해 깨달은 것은 머리가 아닌 마음의 문제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명시하고 있듯이, 바로 씨앗이나 씨뿌리는 사람의 문제라기보다, 씨가 떨어진 토양, 토양의 상태에 달려 있지 않나요? 마음이 문제입니다. 은총의 햇빛과 비를 끊임없이 충분히 내려주시지만, 철저한 자기 죽음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옥토로 변화하기 쉽지 않습니다. 부식토가 되기 위한 과정은 나뭇잎과 동물들의 기름과 뒤섞이고, 습기와 세균에 먹힐 때 부식토가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여정, 내적 회심은 마음 비우기는 곧 마음 바꾸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2) 황폐한 사막에 곧은 길을 내어라: 많은 여행의 경험에 의하면 세상의 어디를 가나 동일한 모습은 늘 도로공사는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길은 한 지역과 다른 지역을 연결해 주며, 이는 단지 길이 새롭게 나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 두 지역이 상호 개방과 소통을 통해 신뢰 회복이 가능해집니다. 이를 증명하는 단적인 예가 바로 남과 북의 도로 연결과 왕래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단절되었지만 남과 북의 도로 개방과 소통의 단절로 남북 대화가 단절되었고, 그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며 서로에게 탓을 돌리고 있음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가 잘 되는데,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과 대화가 단절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사고와 감정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3)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아져라: 상처는 마음에 깊은 골과 흠집을 남깁니다. 열등의식과 피해의식 그리고 자격지심으로 어둠에 갇히게 됩니다. 때론 자기 속임의 자만심과 우월감은 본의 아니게 자아란 담과 벽을 높이 쌓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을 가두게도 합니다. 마음의 주름살과 부풀려진 담장, 거짓과 허영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헤쳐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광야에서 주님의 오실 길을 마련한 세례자 요한은 먼저,

1) 광야를 체험했습니다. 자기 직시와 직면을 통해 자신을 알고, 자신의 어둠과 상처 등을 수용하였습니다.

2) 자기 자신을 수용하였기에 기꺼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지라도 진정한 자기 직시와 직면을 통해 참된 자신을 되찾고, 진리에 승복하려는 어떤 누군가를 위해 외치셨습니다. 그는 세상 밖에서 홀로 머물렀기에 인간적으로 외로움을 겪으셨으며 사람들의 배척과 따돌림을 예견했으면서도,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고 마련하려고 외치셨습니다. 사실 예언자를 받아들여진 시대는 많지 않았습니다.

 

이미 하느님 안에서 자기 자신이 이미 죽었기에, 부식토가 되었기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았기에 그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겸손은 진리에 대한 승복입니다. 겸손이 진리에 대한 승복이라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진리를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진리란 가장 싫어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살고 싶고 찾고 싶다고 하지만 사실인즉 그렇지 않습니다. 막상 진리를 만나고 살아야 할 때 우리는 하나같이 꽁무니를 뺍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살기 위해 거짓된 허상과 망상, 그리고 아상에서 벗어나 진리를 위해 낮아지고, 비워지고 죽어야 하는데 우리는 낮아지거나 비우거나 버리고 싶지 않고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네 삶은 늘 억눌리며 짓눌린 상태에 머물면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기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늘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이란 혹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에서, 생명이 아닌 것에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죽음과 대면할 수 있을 때, 곧 모든 이기적인 사고와 행동에 맞서고 이를 극복할 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즉 자기만의 안락과 안전, 특권의식과 소유, 세상의 뻔뻔스러운 불평등과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동의와 인정 등이 이기주의적인 행태입니다. 인간은 이 모든 것에서 능동적으로 죽을 때, 즉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일할 때 자유롭습니다.

 

예수님처럼 세례자 요한도 이기적 자기중심에서 죽었기에,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고, 세상을 향하여 거침없이 외친 것입니다. 자신은 소리이지 말씀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소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자기 인정과 수용의 겸손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리를 알고 그 자리에 만족하면서 살았던 분이셨습니다. 끝으로 ’피터 프랜스‘의 <삶을 가르치는 은자들>의 다음 표현을 한번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죄악은 바로 나의 거짓된 자아, 말하자면 나 자신의 이기주의적인 욕망에서부터 존재하는 거짓된 자아가 삶의 근본적인 본체라고 가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나는 이 거짓된 자아를 장식하고 그것의 무가치함을 대단한 무엇인가로 포장하기 위해 쾌락과 경험, 권력, 명예, 지식, 사랑을 축적하느라 나의 삶을 소진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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