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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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인 오늘은 장미 주일이라고 하는데, 그러기에 사제의 제의색은 연분홍 장밋빛으로 1년 중 가장 화사하고 아름답습니다. 장미는 기쁨을 상징하니 말씀의 전례 안에서 메아리치는 기쁨과 상통합니다. 성경 안에서 기쁨은 먼저 하느님 안에서 용솟음치는 기쁨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3,17-18)고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과 함께 기쁨의 환성을 올리고, 당신의 신적 생명인 기쁨으로 함께 어울리십니다. 하느님이 먼저 인간과의 만남으로 가슴 설레이며 기뻐하십니다. 사실 기쁨이란 우리가 흔히 알면서 사용하고 있는 즐거움, 쾌락과는 달리 인간이 높은 정신적인 상태에서 맛보는 행복을 뜻하는 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인간은 보다 높은 능력의 단계에서 자기가 알고 소망하는 선(善)을 소유했을 때에 평온과 만족을 느끼며, 그런 기쁨의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릅니다. 이 행복에는 다소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고상한 표현이 기쁨이며, 엄밀히 말하면 이 또한 행복을 가리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의 생명인 기쁨은 온 누리에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계시며 기다리신 것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가 선포하듯이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다!!!>(3,15,17참조) 문제는 가까이 계신 이 주님께서 내 안에 탄생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기 예수님께서는 분명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모두에게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오실 그분을 향해 돌아서라고 강조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이 혹시 기다리던 구세주가 아닐까 생각하며 세례를 받으러 와서는 질문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3,10.12.14참조) 구원받기 위하여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구원을 갈망하면서 행복을 바라는 이라면 누구나 다 한 번씩은 던지는 질문입니다.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까닭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행복은 평온함과 기쁨으로 남에게 전달됩니다. 많은 재물을 모으고 화려한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면 그들의 얼굴에서는 그 누구보다 많은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늘 기쁘게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초조함과 불평이 표출되기도 하고 불만스런 그들의 얼굴은 남에게 혐오감과 짜증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헛 부자가 된 것입니다. 행복과 기쁨 그리고 평온함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적으로 히말라야 산맥의 기슭에 자리 잡은 인구 70만 명의 작은 나라 부탄, 부탄의 국민소득은 2,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고, 90년대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TV가 보급됐을 정도로 문명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국가입니다. 하지만 국민의 97%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인데요.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행복을 만든다.>는 믿음을 없앤 대표적인 사례가 되면서, 자국을 더 행복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선진국들이 이 작은 나라 <부탄>을 롤 모델로 삼고 있답니다. 행복하기 위하여, 기쁘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말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3,11) 옷을 벗어 준다는 것은 단순히 내 몸에 걸친 것을 벗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벌밖에 없는 옷에서 한 벌을 주는 것은 내 존재를 떼어 내어 주는 행위입니다. 요한은 받는 기쁨이 아니라 주는 기쁨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리나 군인들에게 한 조언도 주는 기쁨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는 기쁨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 가장 기뻤던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받았을 때보다 자기의 소중한 것을 남에게 주었을 때가 아닐까요? 예전피정 지도를 하고 난 뒤 본당 사목위원들과 어느 식당에 갔습니다. 물론 주인은 교우분이셨는데 손수 요리한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난 뒤 계산을 하려고 했을 때, 그분의 말씀이 참 기쁘더라고요. 자신이 받은 것을 나눌 수 있어 감사하고 더욱 이렇게 신부님들과 형제들에게 베풀고 대접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고!!! 음식이 아니라 그 형제의 마음이 저와 다른 사람들을 더 기쁘게 했죠! 이처럼 주는 기쁨을 우리는 다 한 번쯤 경험해 봤으리라 봅니다. 저 또한 예전 베트남에서 살았을 때,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축복이고 은총임에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특히 많은 제 은인들이 제게 너무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에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아주 많은 것을 사람들로부터 받았으며, 베트남에서는 다만 저는 받은 것을 사랑의 건네줌으로 살았습니다. 저를 믿고 제게 송금한 것을 저 또한 필요한 곳에 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도하는 유기 서원자들과 함께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해서 청소도 해주고, 목욕도 시켜주면서 그들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함께 놀이도 했었죠. 물론 이 공동체는 정부 지원을 받지 못했기에 모든 게 부족했습니다.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정기적으로 도움을 주었지만, 이 모든 것은 전부 은인들이 저를 믿고 보내 준 지원금이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중점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부류는 시골의 가난한 학생들이었습니다. 농촌의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와 책과 중고 컴퓨터를 구입해서 전달해 주는 기쁨을 저는 마음껏 맛보았습니다. 

이처럼 베풀고 주는 기쁨은 은은합니다. 이 기쁨은 시끄럽지 않고 내 존재 깊은 곳으로부터 은은하게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이 기쁨을 마음속에 파묻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성탄에 오는 아기 예수는 우리에게 이 기쁨을 다시 느끼게 해줍니다. 아기의 얼굴에 피어 나는 기쁨은 주는 기쁨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다 내어 준 발가벗은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대림 3주의 미사 독서와 화답송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기쁨이라는 단어입니다. 주고 베푸는 사람만이 이 기쁨의 맛을 알 것입니다. 다시금 반복해서 그 기쁨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볼까요?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도다.> 세례자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행복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베풀고 주는 기쁨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주는 기쁨으로 자기의 존재를 변화시킨 사람만이 구유에 계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기쁨을 선포하는 대림 3주를 자선 주일로 정한 까닭은, 이는 신자들에게 주는 기쁨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선은 단순히 불쌍한 사람들에게 동전 몇 닢을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구유에 누운 불쌍한 아기는 단순히 부자들의 몸에 붙어 있는 부에서 떨어지는 먼지를 받아먹는 불쌍한 존재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주는 기쁨을 선사하는 위대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받는 기쁨을 치유해주고 받은 것을 나눌 수 있는 아기 예수님과도 같은 분들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낸 선물과도 같은 존재임에 감사하며 삽시다. 아멘.


  1. 사순 제3주간 수요일 : 마태오 5, 17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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