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19.07.21 07:23

연중 제1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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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다보면 지치고 힘들 때, 가서 쉴 곳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쉴 곳은 바로 삶의 쉼과 삶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야 부모님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휴가갈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 휴가도 허락받았고, 휴가비도 받았지만 막상 갈 때가 없다는 게 여간 불편하고 당황스럽더군요. 지금 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쉴 곳이 있고 저를 반겨 주는 가족이 있었기에 안식년 동안에도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수도 생활을 하면서 바쁜 사도직으로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들 때 단지 혼자만이 보낼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머물면서 사람 냄새도 맡고, 사람 사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비울 것은 비우면서 새롭게 시작할 필요를 많이 느낍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기꺼이 받아 줄 사람과 환대하는 집이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이는 단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반겨 준 베타니아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이 예수님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특히 하느님을 살아가는 사제와 수도자들에겐 절실히 필요하고 요구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녀들의 오라버니 라자로는 누구입니까? 먼저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당신 여정에서 쉼이 필요할 때, 마르타와 마리아 집을 방문해서 쉬셨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습니다.>(Jn11,5) 그러기에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찾으셨고, 그 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해 주기도 할 만큼(12,1~8) 예수님은 이 가족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고 봅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어떤 경우엔 손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면 처음에는 주인이 손님에게 <베푸는 존재>가 되지만, 서로를 잘 알고 익숙하다 보면 때론 그 위치가 바뀌어 손님이 주인에게 <베푸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즉 주인이 손님으로부터 <받는 자>가 되는 것인데 이를 잘 증명해 준 사례가 바로 오늘 독서의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주님의  천사 셋을 보고 손님으로 맞아들인 경우와 같습니다.(창18,1-10)

 

이 점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그리고 마르타와 그 여동생인 마리아를 통하여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오랜만에 자신의 집을 방문하신 예수님이 마르타에게는 <오직 음식 대접을 필요한 손님>으로만 보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당하신 거부로 마음이 복잡했고, 이제 곧 예루살렘에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는 그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시라도 그 짊을 내려놓고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고 이해해 주고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말해 보았지만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할 때마다 이해받지 못한 것은 물론 다들 진저리를 내고 들으려는 마음이 없음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이런 당신에게 마르타는 당신을 맞아들이면서 당신을 접대한답시고 일로 분주하였고, 그로인해 몸도 마음도 무거워서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Lk10,40)라고 마리아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예수님께 쏟아 냈던 것입니다. 이런 마르타의 불편한 느낌이 드러난 부분은 마리아의 이름 대신 <제 동생>이라고 호칭하는데서 잘 드러납니다. 또한 이런 마르타의 내면의 감정 표현은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함을 통해서 질문에 대한 답이나 해명을 구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속내를 쏟아내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마르타의 느낌은 물론 그녀의 목소리의 톤도 강하게 느낄 수 있는데, 이에 반해 예수님의 목소리나 느낌은 무척 차분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마르타야 ,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구나.>(10,41) 사실 마르타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삶에는 많은 복잡한 일과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과 책임에 너무 치중하다보면 진정 중요하고 필요한 것을 놓쳐 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타를 책망하기보다 에둘러 말씀하십니다. 사실 주님을 환대하면서 대접도 시중드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영원히 가치 있는 한 가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단 한 가지, 그것은 <주님 발아래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금 지치고 힘든 일을 눈앞에 두고 계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고, 그 분의 마음을 헤아려 함께 공감하려는 마음으로 다만 주님께 집중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은 표현은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10,38>는 표현 중에서 <좋은 몫>이란 단어입니다. 여기서 <좋은 몫>이란 곧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그러니까 마르타가 준비 중인 음식과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잔치와의 대비해서, 식사의 가장 좋은 몫은 부엌에 있지 않고 마리아가 앉은 자리에서 베풀어지고 있는 말씀의 잔치에 무게가 더 쏠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친교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일이란 수많은 반찬과 양념 접시만 두루 갖춘 뷔페 식사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결혼식에 가서 혼인 미사를 주례하고 난 뒤, 뷔페 식사를 가장 싫어하고 불편해 합니다. 그렇잖나요. 수많은 하객들 속에서 서로 먹겠다고 난리 아닌 난리를 치며 먹는 뷔페는 먹고 나면 후회하고 실망합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우리 모두에게 삶을 단순화해야 하고, 중요한 한 가지 일이란 바로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하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고 있는 일 보다 더 마리아처럼 중요한 몫과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의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섬기고 있는 주님께만 우리의 시선을 모아야지 다른 일에 정신을 팔아서 아니 됩니다.

 

혹여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어떤 분이 말하기를 <성인들 중에 결혼한 여성이 그렇게 드문 이유는 다름 아닌 순결이나 자녀 문제라기보다 주로 마음이 갈라지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사실 아내와 어머니이며 주부로 살다보면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분산되어 살아가지 않나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이는 단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갈라지게 하는 삶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어떻게 온전함을 유지하고 생활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씨름해야 하는 물음과도 같습니다. 그 해답은 오늘 복음의 마리아처럼 삶의 가장 분주할 때라도 잠시 멈추고 서서(시46,11참조) 주님 앞에 머물기 위해 시간을 내어 마음을 주님께 집중하면 됩니다. 시간이 없겠지만 최소한이라도 주님 발아래 앉는 쪽을 선택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그 곳이 바로 우리 모두가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는 <많은 일>이 아니라 <한 가지 좋은 몫>을 선택한 곳이며 삶의 재생과 활력을 되찾는 자리인 것입니다.

 

토마스 켈리는 그의 책 <헌신의 약속>에서,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이 우리 눈에는 매우 중요해 보인다. 우리는 줄곧 그런 일들을 거부할 수 없었다. 너무 중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심을 파고 들어가’ 생명보다 깊으신 거룩한 침묵의 하느님 안에 머물면, 인생의 계획을 심령의 고요한 골방에 들여 놓으면, 완전히 열린 마음으로 그분의 인도하신 대로 행하거나 포기할 각오로 그렇게 하면, 그 때는 우리가 하고 있는 많은 일들이 그 생명을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많은 일>을 주님 발아래 내려놓고 그분의 보살피심을 받아들이면서 그분의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때엔 예수님께서 <받는 존재>가 아니라 <베푸시는 존재>가 되실 것이며,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Mt20,28)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온전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Lk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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