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19.08.19 07:26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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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살아오면서 직면하는 의문이지만, 정말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내게 무엇이 부족하기에 아직도 제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토록 주님께서 많은 은총을 베풀어주시고, 사랑으로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심을 느끼고 살아가는데도, 그리고 수도원에서 늘 주어진 모든 일과표를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데도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내적 텅 빔과 공허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 제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의 의문,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Mt19,20)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되리라.>(19,21)는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좀 더 명확하게 알아듣기 위해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6,20~21)는 말씀을 전제하고 들으면 더 좋겠지요. 그런데 이 구절은 통상적으로 <특별 성소>에 대한 전형적인 초대로 이해되어 왔지만, 이는 지나치게 협의로 이해한 측면이 강하다고 봅니다. 이 내용은 바로 모든 인간의 실존이며 보편적인 삶의 문제이기에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인상은 그의 질문에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의 질문은 지극히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9,16)라고 묻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곧 그의 관심은 <존재>의 측면 보다 <활동 내지 소유>의 관점에서 묻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마치 자신의 행위나 소유로 취득하고 획득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지극히 교만하고 당당한 태도를 일단 제쳐두고 대견하게 여기시며 그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19,17)고 그의 질문에 동일한 눈높이에서 답변하십니다. 답변의 근저에는 선이란 무슨 <일, 활동>이 아니고 어떤 분 곧 <존재>라고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부자청년의 잘못된 관점을 선한 마음에서 수정해 주십니다. 곧 요점은 <선한 일>이 아니라 <선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그릇된 관점은 단지 부자 청년만이 아니라 우리 의식 또한 별반 차이가 없으리라 봅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영원한 생명, 구원>을 취득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먼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누릴 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가끔은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분명 젊은이가 한 질문은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하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으로 고쳐 답변하신 의도를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고 내리시는 선물이지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계명을 지켜라.>고 언급하시는데 그 계명이란 모든 사람(=유다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십계명의 일부에다 이웃사랑을 덧붙여서 말씀하십니다. 이에 그 젊은이는 명쾌하게 그런 계명들을 다 지켜왔노라고 응답하면서 이에 대화를 끝내지 않고 <그럼에도 제게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는 곧 그 젊은이의 내면 깊이 내재해 있는 <보다 더 초월적인 그 무엇을 향한 갈망>에서 기인한 물음이라고 예수님도 이해하시고 받아들이시려는 듯싶습니다. 물론 그 질문의 밑바닥에는 <완벽하고 완전해 지고 싶은 욕심>이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 젊은이의 열정내지 젊음의 표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대화의 결과 예수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는 회피할 수 없는 최종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그 젊은이에게 던집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 젊은이의 호기는 어디 간데없이 사라지고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성서는 슬픈 결말을 보여줍니다. 소유욕에 대한 집착이 과하긴 하지만, 그 젊은이가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내적 갈망>이 본의 아니게 자신이 가진 재산 때문에 슬퍼하며 떠났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 옵니다. 가장 장점이며 디딤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실 가장 큰 장애물이자 걸림돌이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었을 까요. 아 이게 인생이구나 싶네요. 그 토록 추구하던 것을 목전에 두고서 돌아서야 하는 그 처지라니.....

 

예수님은 그 젊은이의 선한 의도를 꿰뚫어 보셨기에 그에게 다소 충격적이고 역설적인 제안을 하셨던 것이라 봅니다. 그것은 그 젊은이가 보다 < 완전한 존재>를 꿈꾸고 있다고 보았기에 지금껏 몸에 밴 관습이나 타성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의식과 행동 양식을 보여 달라고 초대했지만 그는 결국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슬퍼하며 떠나갔던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갈망하던 <완전한 삶> 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까닭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어쩜 머리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온 존재로 <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필히 겪어야 하는 진실은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집착 곧 나와 나의 소유물 그리고 나의 꿈과 이상, 내가 살아온 세상과 관계에 억눌리고, 묵이고, 사로잡혀서 그런 모든 것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끊어버리지 않고서는 추구할 수 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단지 그 젊은이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 우리의 내적 현실이며 상태인 것입니다. 신앙생활 혹 제자의 삶은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상상이 아닌 체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 젊은이는 우리 내면을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인가 봅니다. 교황님께서 수도자들과 만남에서 강조하신 면도 가난의 삶을 살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아 그 부자인 젊은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궁금하네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1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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