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20.01.18 08:57

연중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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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다보면 어느 때, 제 눈에는 보이고 보여 지는데 다른 형제의 눈에는 보이지 않나 봅니다. 아마도 보려고 하는 원의가 있고 없고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Mr2,13~17)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길을 지나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2,14)하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지나 가시면서도 허투로 사물과 사람을 흘깃 스쳐보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바라 보셨으며, 그 찰나적인 그 순간에도 레위의 마음 상태를, 그리고 무엇을 지금 갈망하고 있는 가를 꿰뚫어 보셨기에 발걸음을 멈추어 그 앞에 섰던 것입니다. 길은 어떤 목적지에 이르는 수단(=통로)이며, 그 길을 통해서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또한 우리와 똑같은 인생의 길을 걸으셨으며 그 길을 걸으면서 사람이 가야 할 길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다 멈춘 것은 길을 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일어났기에 멈춘 것이라 봅니다. 신앙의 여정도 인생처럼 길을 걷는 것이지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레위가 있어야 곳이 아닌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일어나 길을 걷도록 하시기 위해서 가시던 길을 멈추어 섰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늘 길을 재촉하셨던 예수님께서 그 길에 함께 동반하도록 레위를 부르기 위해서 발걸음을 멈추어 서신 것입니다.

 

사실 레위가 앉은 자리는 바로 세관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일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부양하며 먹고 살기 위해 세리로써 살아가고는 있지만 늘 상 그 곳에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사는 게 죽을 맛,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그리고 매일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답답함과 지루함 그리고 삶의 무의미를 느끼고 있었기에 그 기운을 알아차린 예수님께서 그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어쩌면 그의 모습에는 당신께서 치유해 준 중풍병자와 같으면서 다른 형태의 무감각-무감격-무감동으로 일상에 마비되어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보여 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미 몸에 익숙하고 또 다른 가능성이 자신에게 주어지리라 상상할 수 없었기에 숙명처럼 그렇게 매일 그 자리에 나와 앉아 있었는데 어느 날 길을 가던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다가와 밑도 끝도 없이 대뜸 <나를 따라라.>(2,14)는 말씀이 청천벽력처럼 들려왔으며, 아침잠을 흔들어 깨우는 <자명종>처럼 자신에게 들려 왔을 것입니다. 이는 지금껏 자신이 추구해 왔던 익숙한 안정과 평안을 향한 초대가 아니라 전혀 낯설고 불편하고 어려운 삶의 현실로 초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선뜻 <아니요.>라고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자신의 내면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어떤 내적인 갈망과 갈증을 본인도 느껴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었다고 봅니다. 어떤 그 무엇을 향한 레위의 내적 갈망을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 그의 갈망에 불을 댕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인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2,14)고 표현에서 <일어나다.>는 것은 <부활하다.>는 의미와 동일한 뜻으로 죽음과 같이 영혼이 마비된 상태에서 새로운 삶으로 건너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레위는 어디로 가는지, 어떤 길로 가는 것인지 모르기에 오직 레위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그 길은 분명 어제와 다른 진리와 생명의 길이며, 이제 레위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다시 변화되어 가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아우슈비치의 대학살에서 살아난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라는 문제와 우리 삶을 향한 <타인들>의 요구를 종교의 궁극적인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제일의 철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학이라고 주장을 했었습니다. 즉 <존재>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으니 곧 <관계 안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하여 사용한 은유는 <얼굴>입니다. 타자를 나 자신의 선입견과 기존 범주에 편입하려고 고집할 때, 우리는 상대의 <얼굴을 지우고> 그의 본 모습을 위축시키고, 그가 기여할 바를 축소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나 자신의 이야기에 끼워 맞추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 속에 내주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2,16)라고 불평하고 비난하는 율법학자들은 <그들 곧 세리와 죄인들의 얼굴을 지우는 것>이며, 또한 자신이 갖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에 갇혀서 그들과 그들의 인생에서 함께 계시며 일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거부하고 부정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들으려는 관계 속에서만이 <타인의 얼굴, 존재>를 지우지 않고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하시는 것은 결국 그들의 얼굴을 통해 보이지 않으신 아빠 하느님 얼굴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관계 안의 존재>로써 사신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 바로 그가 혹 그들이 누구이든 관계하지 않고 함께 식사를 드셨다는 점입니다. 그분은 음식에 대한 배고픔보다 함께 식사할 사람들에 대한 배고픔이 있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먹는 것 보다 더 친밀하고 친숙한 사랑의 나눔과 교류 그리고 친교의 시간과 자리가 우리네 인생에서 없다고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질 때 마다 온갖 밑바닥 인생들을 불러 모아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사랑스러운 자를 사랑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물으십니다. 건강한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이 무슨 성공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단지 율법학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말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2,17) 이를 증명하듯이 당신의 제자들을 안락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불러내어 세리와 죄인들, 여자들, 아이들, 나환자들, 이방인들과의 관계 속으로 떠미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이런 부류들의 얼굴을 지우고, 적대적인 담장 안에 가두며,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더욱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의 너무도 강한 편견과 선입견의 틀을 깨부수시기 위해 이렇게 강하고 무거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저를 부르신 하느님의 자비를 알기에 저 또한 베드로처럼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Lk5,8)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저 자신을 잘 알기에 미사의 참회 부분에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부분을 할 때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경문을 바꿔 기도하는 까닭도 저 자신에 대한 자각에서, 그리고 그렇게 표현할 때 마다 제가 불림을 받은 것은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고,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더 필요로 하고, 하느님께서 이런 죄인인 저를 부르셨음을 다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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