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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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한 귀부인이 소시마 수사를 찾아와 슬픈 눈빛으로 묻습니다. <영혼의 불멸성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라고, 그러자 소시마 수사는 부인의 슬픈 눈동자를 읽고 심오한 권고를 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당신이 한 사람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면 그의 영혼이 죽지 않음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때 영혼의 불멸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그는 비록 죽었으나 영원히 우리에게는 살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한 그 사랑이 그를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살아남게 하시고도 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지혜서의 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지혜 2,23) 만일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 하느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인 우리 인간의 생의 끝이 조시마 수사를 찾아왔던 그 귀부인의 말처럼 <사람들은 말합니다. 네가 죽으면 무덤에 묻히고 그 무덤에는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너는 세월 속에 잊혀져 버린다.>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허망할까 싶네요. 그러기에 오늘 복음(Mr5,21~43)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부인과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즉시 사람들이 그분께로 몰려옵니다. 그러자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딸을 구해 달라고 청합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주십시오.>(5,23) 야이로의 딸은 중병에 걸려 시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회당장은 유다인들의 지도자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와는 반대편 세계에 속해 있던 사람이지요. 그러나 딸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음에도 이제 죽어가고 있는 아이 앞에서 그에게는 다른 선택이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딸에 대한 사랑에서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시작됩니다. 딸의 질병으로 인해 그는 율법에서 벗어나 은총으로 돌아서게 되었고, 예수님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 되었습니다. 딸을 온 마음으로 사랑함으로써 ‘야이로’는 영혼의 불멸성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야이로의 간청을 수락한 예수님이 그를 따라나섭니다. 그런데 그분을 따르며 밀쳐대는 사람 가운데에는 고통과 절망에 빠져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 가련한 사람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복음이 이 여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12년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아왔으며,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전 재산을 다 쏟았지만, 오히려 상태만 더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절망적인 것은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5,26)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묘사는 하혈병을 앓는 여인의 절망적인 상황을 부각浮刻시키는 표현들입니다. 모든 것, 즉 건강은 물론 재산과 가족 더 나아가서 속절없는 세월마저 다 잃고 난 다음에야, 저 밑바닥에서부터 희망의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그 희망이 바로 예수님께 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기 떼문입니다.>(2코8,9) 그녀의 처절한 가난함이 예수님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부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5,27)부터라고 복음은 적고 있습니다. 즉 부인이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을 때 그녀가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잡게 된 출발점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난 뒤부터입니다. 아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란 나병환자를 치유하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며, 또 더러운 영이 들린 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주신 분이시라는 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여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마지막 남은 한 가닥 희망의 끈이며 동아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은 절대적이고 절박한 희망의 마지막 몸짓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댔다.>고만 되어 있기에, 다른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따랐는지 그 목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단지 호기심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여인은 완전히 다른 마음의 자세에서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에 따라서 듣는 것도 다르며, 자기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서 들려오는 소문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이 부인의 절박한 상황이 예수님의 소문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 여인의 예수님을 뒤따름은 절박한 믿음과 처절한 희망에서 기인했기에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5,28)라는 간절한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참으로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생각으로 예수님께 다가가는 그 여인의 발에는 힘이 들어 있어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을 것이고, 가슴은 터질 듯 설렜을 것이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더욱 그녀를 흥분시켰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옷에 손댈 수 있는 거리에까지 왔을 때 이 여인은 정성을 다해 믿음과 확신에 찬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을 복음은 <과연 곧바로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5,29)라고 그 극적인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믿음과 직접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그 믿음의 행동이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던 출혈이 멈추고 치유의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아무도 그 순간에 은총이 쏟아졌음을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이것을 감지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옷에 손을 댄 사람을 찾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5,30) 물론 이 말을 듣는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5,31)라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여인이 두려워 떨며 예수님께 나와서 엎드린 채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5,34) 살아있는 인간이야말로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생명을 낳고 살리는 예수님의 힘에 대한 믿음이 그 여인에게 치유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던 한 여인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접하고 있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 죽음의 소식이 전해집니다.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아이가 죽었으니, 예수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5,36)고 하시며, 그 집으로 가시던 발길을 재촉합니다. 이 상황에서 <믿기만 하라.>는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리고 아이의 죽음에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5,39)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니,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비웃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분명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이의 죽음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은 비웃음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아이의 손을 잡고 한마디 말씀으로 소녀를 일으키십니다. <탈리타 쿰!>(5,41) 예수님은 당신 손길과 말씀 한마디로 야이로의 딸을 곧바로 일으키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가 되었음을 예수님의 아시고 그 소녀를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준 치유의 이야기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희망을 걸다가 끝내 이 세상에서 종말을 고할 슬픈 인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인생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도, 죽음과도 같은 역경과 고통에서도 반드시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하신 명령은, 코로나19로 희망을 잃고 절망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일어나라!> 오늘도 예수님은 코로나19로 삶에 지치고 넘어진 우리에게 다가와 은총을 청하는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탈리타 쿰!>(5,41) 우리 역시 야이로의 딸이나 12년 동안 하혈병을 앓았던 여인처럼 또다시 일어나 예전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내세의 영원불멸한 생명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지만, 이를 위해서는 현세의 고통이나 죽음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희망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5,34)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영원한 희망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와 교황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합시다. 코로나 펜데믹 시기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자신의 삶으로 가르치시고 증거하며 살아가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건강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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