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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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갈 것이다.> (묵시록 3, 20)

** 인테넷에 <윌리암 홀맨 헌트의 세상의 빛>을 검색하면, 위 성경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 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유심히 잘 살펴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 위해서....

침묵과 들음은 어느 면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의 문을 두드리실 때를 깨어 기다리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태도이며 마음가짐입니다. 침묵의 본질은 하느님께 한 마디로 <네>라고 대답하기 위한 준비 자세입니다. 이런 침묵 속에서 듣는 자세는 삶의 넓이와 깊이, 높이와 길이를 가져옵니다. 외적 침묵이 이루어질 때, 마음의 공간이 열리면서 하느님의 현존이 그 속에 드러납니다. 사실 외계의 소음은 절반에 불과합니다. 내심의 불안, 사고의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욕망의 왁자지껄한 왕래, 마음의 초조, 냉담으로 쌓아 올린 담벼락 등 우리의 내심은 자갈밭 위를 흐르는 시냇물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제대로 된 삶은 침묵을 지키는 삶입니다. 이는 자신과 하느님을 위해서도, 침묵을 지킨다고 해서 생이 여백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은 순수하고 내용 가득 찬 삶의, 생의 형태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침묵보다 내적인 침묵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의 침묵이 곧 기도를 위한 가장 좋은 준비이며 기도입니다.

 

침묵을 배우는 것, 이것은 기도 수업에 있어서 가장 힘들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침묵이란 결코 소극적인 것, 즉 말과 말 사이에 끊김이나 이야기의 일시적인 중단이 아닙니다. 침묵은 몸과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자세입니다. 관상 기도의 경지 곧 내적 고요와 침묵에 도달한 관상가는 다시없이 훌륭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서 기도의 음성을 들을 줄 알고, 또 이 음성이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안에서 말씀하시는 ‘타자의 음성’ 곧 하느님의 목소리임을 압니다.

1) 침묵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기도의 선행 조건으로 두 가지 요인 곧 고독과 침묵을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 고독(= 피정이란 물러남; 避世靜念)은 홀로 있음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머묾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고독을 통해서 침묵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온전히 머물 수 있고, 하느님과 친밀한 통교를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에 관한 시나이의 성 그레고리오의 가르침에 의하면, 기도와 침묵 사이의 상호 관계를 그는 뚜렷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과정에서, 흔히 하느님의 행위보다는 인간의 행위가 일차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기도라는 인격적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는 쪽은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작위作爲가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레고리오는 그의 저서 <총론 叢論>에서 내적 기도의 실상을 설명하고자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는데, 그 끝은 전혀 예상 밖의 단순한 말로 끝맺습니다. <기도를 길게 받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기도는 곧 하느님이요, 하느님은 모든 인간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신가!> 기도는 곧 하느님이십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 20)라는 의미가, 기도에 관한 그레고리오 가르침으로 더 명료해집니다. 아울러 세례자 요한의 메시아에 관해 표현했던 말속에 바로 내적 기도로 통하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 기도하는 것이 침묵하는 것이라는 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Tito Calliander는 <수덕의 길>에서 이런 지혜로운 말을 남겼습니다. <기도할 때면, 그대 자신은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대 자신은 침묵을 지키고 기도가 말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곧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참된 내적 기도는 말을 멈추고 내 마음 안에서 들려 오는 하느님의 무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들을 중단하고 하느님의 행위에 흡수되는 것입니다.

또한 시나이의 성 그레고리오는 기도의 과정에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행위의 성격을 명확하게 지적해 줍니다. 곧 <기도는 세례의 출현(出現)이다.>고 요약합니다. 주님의 역사하심은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저마다 하느님의 거룩한 모습을 따라 창조된 까닭에, 하느님은 모든 사람 안에 현존하시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이 하느님의 모습은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써, 비록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흐려지고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그 모습이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교부들이 소위 <우리 마음의 은밀하고 내밀한 방>이라고 부르는 곳에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됨에 따라 원래의 아름다움과 광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자들 절대다수가 그 같은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씻어주시는 그리스도와 내주하시는 성령(=위로자)께서 우리 안에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내적 현존과 활동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침묵의 기도는 바로 이 세례 은총의 재발견이요, <출현>을 의미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은총이 우리 마음속에 은밀히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에서, 우리가 성령의 활동을 지금 당장 직접적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완전한 내적 인식과 의식적인 자각의 상태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를 하느님의 내재적 현존의 발견으로 보는 관점은 성체성사와 연결해도 유사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2) 들음

 

기도란 하느님과 대화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하느님과 대화인 기도에서 주된 흐름은 인간이 하느님께 말을 걸고 말씀을 하는 것보다도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데 있습니다. (=독백이 아닌 대화) <하느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3,9)라고 말하는 사무엘처럼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태도는 말하는 것보다 들음이 우선해야 합니다. 프랑스 시인 폴 끌로델은 <환자들이란 조심하라고 요청받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 말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조심해서 들으라고 요청받은 사람들이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신 차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도록 초대받는 사람들입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에 대해서 취해야 할 신앙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신앙의 준비 단계인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부터 22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르기까지 구원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듣는 인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신앙의 가장 일차적인 계명입니다. 성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어휘가 바로 <듣는다.>는 단어입니다. 구약에서는 1,100번이 그리고 신약에서는 425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듣는 존재이고, 들어야 할 존재입니다. 참된 들음의 모범은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셨습니다. 마리아는 영보의 순간(루카1,26~38)과 가나안의 혼인 잔치(요한2,1~5)에서 드러난 것처럼, 듣는 인간의 참된 태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마리아의 생애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Obedientia은 본디 ob-audire, ‘귀 기울여 듣다’에서 유래했음)하는 Fiat의 삶을 사셨습니다. 아울러 요셉 성인 역시 구원사 안에서 아브라함처럼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하느님의 말씀만을 듣고 순종하며 나아가셨고, 그렇게 한 생을 사신 분이셨지요. 그래서 예전에 성 요셉을 묘사할 때, 들을 귀를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해서 요셉 성인의 귀를 아주 크게 그렸다고 합니다.

복음서 안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고, 루가의 사도행전에 의하면 초대 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는데 몰두하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도록 들음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듣고 배우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침묵입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예전의 사람들에 비해 조용한 분위기, 침묵이나 고독을 싫어하고 침묵을 참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시없이 침묵 가운데서 하느님의 발소리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침묵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 소년이 그의 스승에게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스승님, 왜 하느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아브라함에게나 모세에게 그리고 예레미야와 많은 예언자에게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스승은 비록 아프긴 하겠지만 자신의 머리를 힘 있게 때렸습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내 아들아, 그것은 하느님께서 더 이상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누구도 오늘날 더 겸손되이 듣기 위해 충분히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누구도 듣기 위해 충분히 멈추어 서서 낮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스승의 일갈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충분히 멈추어 서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 11)

열왕기 상권 19, 9~12절에서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는 미풍 가운데 조용히 다가오시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위협하시지도 강요하시지도 않으시기에 열린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Laing은 말하기를, 우리는 세속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현대는 아모스 예언자와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하는 세상으로 기아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아는 빵의 기아도 아니고, 물의 목마름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의 들음의 기근의 때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1,15) 들음은 주의 깊게 듣는 것으로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다시없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들음의 자세는 성모 마리아처럼 들은 것을 마음속에 충실하게 간직하여 말보다는 사건을, 인격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루카1, 19.51) 깊은 들음은 말하는 존재와 듣는 존재 사이의 인격적 친교이자 사랑의 앎입니다.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 4) 듣고 안다는 것은, 내적으로 친밀하고 애정이 깃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잘 듣게 되고 말만이 아닌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말타와 마리아(루10,38~42)는 한때 활동과 관상으로 구분해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가졌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말타와 마리아는 한 인격의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다만 이 둘을 어떻게 조화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게 모든 수도회의 관건입니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들으면서 성장하는데, 첫째 다른 사람의 말을 귀로 듣는 일차적 들음이 있고, 둘째 자기 안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데, 그것은 모름지기 양심의 소리, 자기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소리는 초월한 저쪽으로부터 오는 소리,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귀를 가져야 한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으며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침묵의 생활이 필요하고, 침묵의 목적은 하느님께 다시없이 귀를 기울이기 위하여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지각없는 소리를 침잠하려는데 있습니다. 저희 수도회의 회헌 37항에는 침묵과 들음의 상호작용을, <기도의 정신에 꼭 필요한 영혼의 깊은 안정과 평화를 보존하게 하며, 성가신 일에서 해방시키고, 일상사의 관심에서 생기는 불협화음을 진정시키기 때문입니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의문은 그러면, <그저 하느님께만 말씀드리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런 기도를 받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말로 표현되는’ 기도에서 ‘침묵의’ 기도로, ‘노력을 해야 하는’ 기도에서, ‘저절로 작동하는’ 기도로, ‘나의 기도’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바치는’ 기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이 의문점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하나씩 그 해결책을 찾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인격체들 간의 상호적 자유와 자발성이 없이는 참된 관계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기에, 내적 기도 역시 특히 그렇습니다. 기도하려는 사람들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고정불변의 법칙들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 보이시지 않으면 안 되기에 어떤 인간적 기교나 기술은 기도 과정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면 곧 마음의 나라에서 이루어진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은 그 형태가 천태만상이라는 점입니다.

 

다만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 경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1) 기도는 겸손되이 듣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현대인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겸허한 자세는 나 아닌 타인을 인정하는 길이며, 타인을 받아들이는 일이기에 이는 곧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2) 기도는 솔직해야 하며, 기도는 자기 정직입니다. 솔직하다는 것은 자기의 요구를 솔직하게 말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시인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연스럽게 나서야 합니다. 척하지 말고 겉꾸미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그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 우리가 가장 자연스럽게 쓰는 말 그대로 하느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가장 친한 벗이기에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자연스럽고 또 다정스럽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그것 이외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3) 기도는 우리 생활의 근본적인 요구가 있는 것들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삶의 직접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평화와 생활을 위한 근본 능력, 죄 사함을 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기도할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도의 방법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근본 요구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음을 배울 때, 비틀거리다가 제대로 걸을 수 있는 변화와 같은 외적 변화가 있을 따름이며 이는 좀 더 확고한 단계로 진전을 의미하기에 항구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합니다. 사랑의 관점에서,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아동기, 사춘기, 청년기, 중장년기, 노년기는 그 시기에 맞는 사랑의 표현이 달라졌을 뿐이지 사랑이 변한 것은 아니잖아요. 사도 바오로의 표현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코린 13, 11)]

그런데 우리는 기도에 관한 강박, 곧 스트레스가 참 많고 심합니다. 기도를 잘해야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분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분심은 극히 인간적이기에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분심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 기도하는 동안 집중하지 못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분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분심이 들면 단지 죄책감이나 불편한 감정을 갖기보다 한 번쯤 깊이 있게 분심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론 분심은 하느님의 계시인 경우도 있습니다. 분심의 내용은 가장 진솔한 마음의 욕구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의도적으로 하는 기도보다도 분심 가운데 하는 기도가 더 진솔하고 솔직한 기도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까닭은, 그 분심을 통해서 자신의 관심사,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쏠려 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심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마음 안으로 흘러왔다 흘러나갑니다. 그냥 분심을 흘러가도록 그냥 놔두십시오. 이렇게 하는 게 어렵다면, 분심을 기도의 제목이나 내용으로 활용하여 그 점을 하느님과 함께 대화(=자신의 최대의 관심사를) 하도록 하십시오. 분심은 때론 치유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이나 기억은 만일 우리가 치유받고 싶다면, 치유할 때가 됐다면 의식으로 들어 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분심이 들거든 그것에 마음만 쓰지 않으면 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시처럼 단순한 생각을 소설로 확대하거나 발전시키거나 휩쓸리지 않도록 하면 됩니다. 분심을 굳이 없애려고 하신다면, 양손에 돌을 들고 바닷가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돌은 분심입니다. 손을 벌려 돌을 바다에 놓으십시오. 처음에는 파문이 일겠지만 분심이 바다 깊이 가라앉을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마음의 고요함이라고도 합니다. 혹 가라앉지 않고 떠돌아다니더라도 놔두십시오. 밀물이 밀려와서 가져가 버리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또 다른 표상은, 다리 위에 서서 아래로 흐르고 있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강물은 의식의 흐름이며, 강 위에 떠 있는 배들은 분심을 나타냅니다. 배들은 강물을 따라 흘러갑니다. 배들이 떠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지만, 배에 올라타지는 마십시오.

또 다른 기도 중의 문제는 졸음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면 잠을 자는 습관적인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예전에 저는 성당에서 기도하는 형제를 보면서 판단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반성해 보니, 나는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있었고, 그 형제는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샤를르 베기는 <기도하다 잠든 영혼처럼 아름다운 영혼은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성당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졸음이 오면 자세를 한 번 바꿔 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교리입문 과정 중에 어느 수녀님의 표현, <혹여 잠이 잘 들지 않을 때 묵주기도를 하면 잠을 잘 잘 수 있습니다.>고 하더라고요. 이는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기도하다 잠든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잠을 자기 위해서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목적이 전도된 경우입니다

 

이런 예를 한번 들어 볼까요? 어느 날 프로야구 결승전이 공교롭게도 저녁 묵상기도 시간과 겹쳤다고 가정합시다. 매일 하는 기도라고 대수롭게 생각하고 야구 중계를 보았다면, 그는 분명 시간을 자신을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묵상 시간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야구 중계를 보느냐 하는 갈등 가운데 묵상 시간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그런데 묵상하는 동안 내내 분심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도입니까? 아닙니까? 그는 갈등 가운데 있었지만, 시간을 하느님을 위해 바친 것이기에 기도입니다. 물론 최대한 주의를 집중하고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그리고 ‘깨어 기도해야겠지만!’ 문제는 그 시간을 누구를 위해 사용했는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기도는 성급해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루에, 혹은 한때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애의 문제입니다. 아울러 기도는 하느님과 사귀는 것이기에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문제는 순간이 아니라 영원입니다. 서서히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서로에게 스며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부족하거나 결여될 때 기도는 의무적이거나 습관적인 기도로 전락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때 기도는 메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가 활성화되지 못한 것은 그분의 사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한정,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사랑하고 빠르게 헤어짐’에 익숙한 현대인들, 그러기에 요즘 기도도 역시 인스턴트화 되는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빨리빨리 이루려는 태도. 결국 기도는 해야 하니까 하는 의무감으로 압박을 느낄지 모릅니다. 기도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산다면 기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처럼 기도도 천천히 스며들고 농익어 가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온 정신을 쏟아 기도할 수 없을 때라도, 몸으로나마 사랑하는 주님 앞에 머무르십시오. 그 또한 기도입니다.

 

기도 안내 2. 침묵의 풍요로움(=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침묵은 위대한 계시이다>라고 노자(老子)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서가 하느님의 계시라고 생각하는 데에 퍽 익숙합니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침묵이 드러내 보여주는 계시들을 알아차리시게 되길 바랍니다. 성서가 제시하는 계시를 이해하려면 마음을 열고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침묵이 알려주는 계시를 이해하려면, 우선 나 자신이 고요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제일 첫 번 훈련으로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도록 노력 해 봅시다.

 

각자 편안한 자세를 취하시기 바랍니다. 눈을 감으십시오. 이제 몇 분 동안 침묵을 지키겠습니다.

먼저 고요해지도록, 가능하면 마음과 정신이 온전히 고요해지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렇게 되거든, 그 침묵이 자신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사실들을 주시하십시오.

시간이 되면 눈을 뜨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원하시는 분은 10분 동안 자기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체험했는지를 모두에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이야기할 때에는, 우선 자신은 고요해지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시도했으며 또 그 방법이 어느 정도 성공적이이었는지를 이야기하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면 그 고요함을 한번 묘사해 보십시오. 침묵 속에서 체험한 것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이 훈련 중에 생각하고 느낀 것을 무엇이든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방법을 시도해 본 사람들의 경험을 들어 보면 매우 다양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침묵에 전혀 익숙해 있지 않음을 발견하고는 퍽 놀라곤 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의 끝없는 방황을 멈출 수도 없고, 또한 마음속의 혼란한 감정들을 잠재울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쉽게 침묵에 이르렀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그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고통스러워서 그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침묵은 일종의 두려운 체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방황하는 생각들도 사실 하나의 큰 계시가 아니겠습니까? 자기 마음이 떠돌고 있다는 그 사실이 바로 스스로에 대한 계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간을 내어 이 방황하는 마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이 어떤 유형의 방황을 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그것이 드러나고 있는지를 체험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용기를 북돋아드리겠습니다. 자기 마음이 방황을 한다거나 또는 내적 동요가 심하다거나 또는 도저히 고요하게 있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는 그 사실은, 바로 자기 마음속에 어느 정도의 고요함을, 적어도 이런 사실들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의 고요함을 지니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다시 눈을 감고 마음이 방황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느껴 보십시오. 단 2분 동안만...

이제 자기 마음이 방황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그 고요 자체를 느껴 보십 시오.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이 최소한의 고요를 기반으로 해서 앞으로 기도하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고요하게 될수록, 그 고요가 여러분 자신에 대해 더욱 많은 것들을 알려줄 것 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고요는 여러분에게 바로 여러분 자신을 드러내 보여줄 것 입니다. 나 자신 바로 그것이 침묵의 첫 계시입니다. 그리고 이 계시 안에서 또한 이 계시를 통해서 여러분은 그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것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즉 지혜, 평정(平靜), 기쁨, 그리고 하느님 등을.

여러분이 이렇듯 소중한 것들을 얻고자 한다면 그저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또 토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필요한 것은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체험해 보십시오.

눈을 감으십시오. 다시 5분 동안 고요해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이 훈련이 끝난 다음, 먼젓번 훈련보다 더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를 유의하십시오. 그리고 고요가 알게 해준 것 중, 먼젓번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을 이번에는 알게 된 것이 있는지에 대해 유의하십시오.

이 고요함의 계시에서 빛, 영감(靈感), 내적 통찰력 등의 깜짝 놀랄 만한 것들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아예 아무것도 찾지 마십시오. 그냥 관찰하는 데서 그치십시오. 다만 의식 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십시오. 모든 것을 비록 그 일들이 아무리 케케묵고 평범한 것들이라 해도 말입니다. 사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일들이 마음에 떠오른 것입니다. 여러분이 깨닫게 된 것들이 기껏 손이 끈끈하다든가 자세를 안 바꾸고는 못 견디겠다든가 또는 자기 건강을 걱정하는 게 전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이것에 대해서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식하게 된 것들의 내용보다는 그 의식의 질이 더 중요합니다. 그 질이 높아질수록 자신의 고요도 한층 깊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란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뻐할 것입니다. 계시는 힘입니다.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하나의 신비스런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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