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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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시작하면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때론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의 울림입니다. 물론 세례자요한의 목소리는 차츰 잦아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요한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옵니다. 제발 사랑하며 살라고 말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단도직입적으로 <서로 사랑합시다!>(1Jn4,7)고 권고하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까닭은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기 때문>(1Jn4,9)이라고 상기시켜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인생들이었습니다. 허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아났고 그 사랑을 통해서 아직도 삶을 삶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수많은 지치고 힘든 영혼들을 사랑하자고 다짐하는 시기가 성탄시기이며 새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변화되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동일한 상황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전혀 다르게 보고 있음을 오늘 복음(Mr6,34~44)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군중을 바라보는 마음의 시선이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만나고 가르침을 듣기 위해 먼 거리도 배고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따라온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6,34) 해매이고 굶주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참으로 가엾은 마음이 드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말씀으로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었으며 어떡하든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인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은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이셨습니다. 예전 먹을 것이 없이 가난한 세상을 살았던 우리 어머니들 역시 늘 배고파하고 먹을 것을 달라고 칭얼대는 자식들을 제대로 마음껏 먹이지 못해 안타까워 하셨는데, 아마도 이런 어머니의 마음 이상으로 예수님은 군중들을 바라보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제자들 역시 군중들의 허기진 모습, 지친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 가를 알지 못했기에 그저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늦었으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스스로 먹을 것을 사던지 구하도록 하는 게>(6,35~36) 타당하다고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지만 군중 가운데에는 빵을 구할 여유가 있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굶어야 할 형편인 사람이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했고 도와 줄 방안이 없었기에 군중들의 처지를 알면서도 군중의 딱한 처지는 단지 그들의 사정이며 문제일 뿐 그들의 문제를 함께하고, 해결해 보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할 것인가? 이는 단지 예수님을 따라왔던 대책 없는 가난하고 단순한 그들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체는 백성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른 채 지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할 제자들(=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목자를 잃은 양처럼 지쳐있고 배고픈 군중들을 보면서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 지 그 해결책이 없었던 것이며 그래서 마을로 가도록 돌려보내는 게 당시로썬 최선책이라고 보았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문제를 풀 능력이나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력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현실적인 수단이나 상식적인 수단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한계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6,37)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주님의 이 말씀으로 제자들은 보다 확실히 자신들의 한계와 무력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진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다는 사실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6,37)고 제자들에게 말했을까요?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어떤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다 풀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에 무작정 따라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예수님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허나 제자들은 그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의 존재와 그분의 능력을 확실히 알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들과 함께 계신 주님이 자신들이 찾고 있는 해결의 열쇠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바로 당신이 직접 그들을 <먹이겠다!>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제자(=인간)들은 불가능하나 예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느 만큼이나 빨리 터득하고 믿느냐에 따라서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해결책이 아닌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귀의하고 의탁할 수 있으며, 단지 우리는 그분이 하신 일을 협력하고 협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런 일을!>하고 의심하며 불신하기보다, 단지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에 말없이 <네.>라고 응답하며 실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내심으로 긴가민가하면서도 스승께서 하라고하신 대로 사람들을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6,40) 앉히자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6,41) 그저 제자들은 빵과 물고기를 군중들에게 나눠 주기 시작하였는데 빵과 물고기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열 두 광주리에 빵 조각과 물고기가 가득 찼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에도 제자들 외에는 군중들 가운에 어느 누구도 이를 알아차린 사람도 감격해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제자들은 <이게 뭐지!! 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5병2어의 기적>이며, 이 기적의 수혜자는 군중들이었지만, 이 기적이 지목하는 주체는 바로 제자들이었으며, 이 기적을 통해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보다 깊이 깨닫고 스승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더 굳게 가졌으리라 봅니다. 이 오병이어 기적 이후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여하한 문제와 난관들을 만날 때 마다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이 아닌 늘 함께 계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께 의탁하며 단지 봉사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혹 마실 것을 주어라, 너희가 입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실 때마다 우리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손수 그렇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이 하신 일을 돕는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 분은 모든 것을 시작하시며 마치실 것이며, 단지 우리는 그분의 도구이자 연장으로 봉사하고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께서 이미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음을 잊지 맙시다.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Jn2,5)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목현장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이 아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도록 주님께 의탁하며 다만 그분의 봉사자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사랑으로 행하고 나머지는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면 되리라 봅니다. 사랑은 두려움이 없으며,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으로 한 사랑의 모든 행위에 분명 축복하여 주시고 구원적 사랑을 체험하게 하리라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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