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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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류 회사의 입사 시험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답을 쓰시겠습니까? <당신은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버스 정류장을 지나려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추위와 두려움에 떨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힘에 부쳐 거의 죽어가는 할머니, 어릴 적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의사, 그리고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의 여자. 그런데 당신은 딱 한 명만을 차에 태울 수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태우겠습니까?> 수백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수석으로 합격한 응시자가 써낸 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저는 의사 선생님께 제 차 열쇠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의사 선생님께서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갈 수 있도록 하고, 저는 제 이상형의 여인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겠습니다> 기발하고 재치 있는 답변이라고 봅니다. 역설적인 발상이지요.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지금껏 그분은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바로 그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Jn12,23) 오늘 복음은 해방절로 추정되는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몇 명의 그리스 사람들이 필립보에게 가서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12,21) 라는 부탁을 드림으로써 예수님의 “때가 왔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의 등장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왔다는 때”를 통하여 가져올 보편적인 구원을 암시합니다. 이로써 세상을 향한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계시적 활동과 가르침은 끝나고, 이제 유다인과 이방인들을 포함한 세상은 더이상 귀로써 들을 것은 없고, “오직 눈으로 볼 것만”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통하여 과연 무엇을 보게 될까요? 세상이 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에 이르는 역설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2,24)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 해설인 동시에 당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올 것임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밀과 보리를 땅속에 심으면 땅속의 습기와 적당한 온도에 의해 점점 썩어서 싹이 나고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 싹들은 밀과 보리 안에 있는 영양분을 먹고 자랍니다. 그것을 다 먹고 나면 흙 속에 있는 영양분을 먹고 힘차게 자랍니다. 땅에 심은 밀알이 반드시 죽고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희생 없이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래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2,6~7)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썩은 밀알이 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삶에 집착하지 않고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오래 살려고 집착한 적이 없었고, 부유하게 살려고 물질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편안하게 살려고 안락한 삶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말 한마디면 얼마든지 십자가를 면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당신 뜻을 포기하셨습니다. 편안함도 부유함도 명예도 심지어 생명까지 포기하셨습니다. 바로 그랬기에 부활하시어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라자로를 살렸고, 그것을 계기로 당신은 생명을 잃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삶을 완성에로, 구원에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의 원천이 되고 우리 신앙의 동력이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보다 더 큰 힘으로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12,25)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생명에 집착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현대인들은 생명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하고, 부요하게 인기를 누리며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하면 연상되는 말씀이 무엇이지요!! <생즉필사 사즉필생 生卽必死 死卽必生, 무릇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요, 죽을 각오로 싸우는 자는 반드시 살 것이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말씀을 반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포기하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심으로써 완벽한 포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유하셨지만 가난한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8,9참조) 그러기에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2,10~11) 사실 집착하지 않고 포기하면 더 좋은 것, 더 큰 것,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하늘의 귀한 선물을 주시고자 포기하고 손을 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손에 쥔 것을 빼앗길까 봐 더욱 꼭 쥐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당신의 목숨을 바쳐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주인에게 충성한 노예처럼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며 섬기신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비전을 바라보며 섬기신 것입니다. 
                                             

흔히 사람을 <거미와 개미 그리고 꿀벌과 같은 사람>에 비유합니다. 곧 <없었으면 좋을 사람, 있으나마나 한 사람, 꼭 있어야 할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람은 살아 숨을 쉬면서도 죽은 삶을 살 수 있고, 죽어서도 산목숨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암(癌)이 무서운 것은 세상에서 자기만 위해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죽지도 않고 자기만 살려고 다른 생명을 죽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삶입니다.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바로 그곳에 살아있는 생명이 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오히려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자신이 이제껏 본 적도 알지도 못했던, 예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가치와 시선으로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이는 서로 나누고 사귀며 섬기는 세상입니다. 누구든지 제 것을 아끼면 오히려 잃게 되고, 남을 위해 베풀면 실제로 얻게 되는 것이 참 세상의 이치입니다. 자신을 더 낮추고 버리고 비워, 되도록 많이 깨지고 망가지면 오히려 목적한 바를 얻게 되는 역설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법칙에 따라 산다는 것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법칙을 세워 몸소 이를 보여 주어야 함에 앞서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12,27)고 하셨던 이유가 바로 이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의 귀중한 것을 내어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생명을 얻기 위해선 먼저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주실 하느님께 <큰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히5,7)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 역시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탄원해야 합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아멘.> (시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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