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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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호치민의 한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타르마>라는 다큐멘타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잠시 식사하면서 들었던 이야기가 제 마음에 아직도 깊이 남아 있습니다. 티벳어로 타르마(佛法)란 본디 <바꾸다>라는 뜻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티벳 승려들은 자신의 고통을 들이마시고 자신의 마음을, 생각을 바꾸면서 세상을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자 부단히 수행한다고 합니다. 자신을 바꾸면서 남을 이롭게 하고 자신이 변하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 결국 불법도 복음의 첫 마디도 자신이 먼저 변해야 자신도 살고 이웃도 살릴 수 있다는 초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울러 예전 어느 수녀님의 소개로 한의사를 만났습니다. 그 한의사와 체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직도 기억에 남은 말 한마디가, <신부님, 고정된 체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인즉, 나이가 들면서, 또 기후나 사는 장소에 따라서 체질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단 하나 변하지 않은 것 하나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한 가지만 변하지 않습니다. ’>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인생은 끊임없는 만남의 연속이고 그 만남의 첫 시작은 부모와 만남이지요. 그리고 형제와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부모와 형제와 만남은 우리가 선택한 만남이 아니라 운명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의지적인 선택에 의한 만남도 있습니다. 만남에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상대방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만남도 있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과 만남은 우리의 선택 보다 하느님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초대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Jn15,16)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만남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만나고 싶어 우리를 부르고 초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첫 제자들의 영적인 만남을 전하고 있는데, 그 만남은 단지 첫 제자들만의 만남이 아닌 곧 우리 각자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예표(豫表)합니다. 첫 제자들의 만남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나의 만남은 과연 어떤 만남인지 물어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으로 당신의 일을 도와줄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그리고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셨다.>(Mr1,16)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는 것>이 우연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은 우연도 필연도 아닌 제3의 사건 곧 사랑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첫 제자들의 만남은 사랑의 만남,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레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가난한 어부들이었고 부모와 가족을 위해 땀 흘리며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만나야 할 시간을 모르고 있었지만, 하느님은 그들과 만나야 할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셨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곧 만남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17) 하시며 부르심의 목적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18) 그들이 단번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즉시성’과 ‘순수함’의 열매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즉시 깨닫고 감사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영적 통찰력이라고 부르는 이 깨달음의 은총은 하느님의 사랑을 감지하는 영혼의 능력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수용력을 말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즉시’ 회개의 삶을 시작했듯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그 부르심을 진정으로 깨닫는 순간에 즉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쉬고 있는 신자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많은 이들이 <먹고 살기가 바빠서요.>라는 대답을 합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신앙생활을 뒷전에 미루어 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에서 받는 은총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자신의 삶에 바쁜 것입니다. 바쁜 삶의 여정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을 배려할 줄 아는 시간이 없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점점 사는 일에 여유도 잃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고 나서 즐기는 여가생활이 아닙니다. 취미 활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삶일수록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려고 할 때, 진리의 길을 찾게 되고,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되며, 삶의 의미와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쉬고 있는 형제자매들은 잘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부르심과 그 응답의 즉시성과 순수성의 또 다른 모델이지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깨달았기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3,8)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확신에 찬 권고를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1코7,29참조) 신앙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지상의 삶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모든 것은 다 사라지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느님 안에서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처럼 살아가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정신은 데레사 성녀의 말씀으로 다시 울려 퍼집니다.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간다. 다 지나가고 오직 하느님만 남는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여라.> 데레사 성녀의 말씀처럼 그 어떤 것도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기를 멈추게 할 수 없기에 우리를 생명과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기 위해 이러저러한 것들을 버리고 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부르심 받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갈 뿐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불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움켜쥐고 있는지요? 많은 핑계를 대면서 그것을 내 손에 움켜쥐고 버리지 못하고 있는지요? 무엇이 진정 주님을 따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어떤 것들이 필요 없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포기한다는 것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으면 하느님의 것을 얻게 됩니다. 내 것을 포기하면 그때 하느님의 것, 하느님 나라를 주십니다.

 

예수님과의 제자들의 만남은 은총의 만남이었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근본을 바꾸어 놓는 대사건이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오늘 화답송의 <주님의 행로를 걷는 것이며, 진리에로 전환입니다.>(시25,4참조) 새로운 세계 곧 하느님 나라에로의 진입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과거와의 단절이며 묵은 인연과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과거에 발목이 잡힌 사람, 혈연과 지연, 학연 및 인연에 연연하는 사람, 자신 안에 묶인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고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즉각적으로 자신의 전부인 배와 그물을 버린 첫 제자들은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똑똑하고 유능하고 잘난 사람보다 단순하지만 단호하게 모든 것을 버릴 줄 알고 끊을 줄 아는 어부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Mr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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