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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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의 표현처럼, 역사는 과거 B.C와 A.D에서 B.C와 A.C로(=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구분될 것이라고 하는데, 저 역시 이런 발상에 대해 동의하고 동감합니다. 코로나는 분명 역사의 변곡점이 되고 있고, 그 이전으로 돌아갈 확률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저의 오늘 나눔은 코로나 이후의 뉴 노멀(New Normal 새로운 표준)에 대한 생각과 그에 따른 저의 해결책으로 <충실함>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그럼 뉴노멀이란 무엇인가를 잠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뉴노멀'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2004년 로저 맥너미(Roger McNamee)에 의해서입니다. 그는 <새로운 표준: 고위험 시대의 거대한 기회>(2004)라는 저서에서 인터넷 시대의 세계 경제를 위협하는 요소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탐색하면서 '뉴노멀'이라는 용어로 새롭게 보편화되는 경제 환경을 정의했습니다. 이후 특정 사건이나 시기를 변곡점으로 보편화된 새로운 사회적 문화적 현상이나 상황을 뜻하는 용어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코로나는 단순히 병리학적 혹 역학적 범주로 파악할 수 없는 사회 문화 경제 현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더욱 코로나가 거의 1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코로나는 먼 훗날까지 지워지지 않은 흔적을 남길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분야에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분야만이 아니라 종교 또한 새롭게 코로나 이후 그 변화에 대처하고 적응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서울 교구 이미 코로나 이후 대처하기 위한 Task Force 구성함)

코로나로 인한 공포와 충격을 겪으면서 전 세계가, 모든 분야(=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종교, 산업 등)에서 뉴노멀(새로운 표준)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처음 겪는 일은 아닙니다. 다만 2008년 금융위기나 1998년 I.M.F 위기 때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넓은 시선, 곧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번이 처음은 아니며, 20세기로 국한해서 보더라도 이미 뉴노멀을 필요로 하는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1차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뉴노멀과 game changer(=판도를 돌려버린 사건이나 인물, 상황 등: 박근혜 탄핵의 게임체인저는 최순실의 국정농단이었고, 1차 세계대전의 게임체인저는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암살 사건 등)로 바뀌었습니다. 양차 세계 대전으로 1억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하면서, 더더욱 그리스도교 국가 간에 전쟁으로, 새로운 파라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서 근대로 들어오면서 하느님의 자리를 이성이 차지했지만,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반지성적. 반합리주가 태동, ‘너는 누구냐? 너로 살라!’는 실존주의 등,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 과학과 기술이 그 자리를 대체해 나가고 있습니다.)

세계대전 이후 군수산업 발달하고 이런 연장선상에서 뉴노멀, 새로운 표준이 발생했죠. 그것은 바로 여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바람직한 여성상은 현모양처형이었다면 전쟁 이후 수많은 여성이 가정에서 공장으로, 직업전선으로 뛰어들었으며 이로 인해 인스탄트 식품이 만들어졌으며, 경제력을 확보한 여성 지위가 향상되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여성 해방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로써 여성의 선거권과 피선거권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쟁 이후 흑인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계대전을 통해 총알은 백인이나 흑인이나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이후 흑인 인권운동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이처럼 산업 발전으로 중산층 증가하고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물질만능주의 의식 심화되었으며 이는 자연스레 애국주의와 가부장주의 그리고 권위주의가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기성세대의 소비문화에 집착에 대한 반발 조짐이 파생되었다. 이로 인해 요즘 흔히 부정적으로 들리는 ‘라테 문화’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 움직임은 바로 68혁명이며, 우리 의식의 시발점이 바로 68혁명이고, 이처럼 68혁명은 부인할 수 없는 변곡점이었습니다.

&&& 68혁명: 프랑스 파리대학의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는 시위가 파급 확장되었으며, 이 운동의 영향으로 <대항 문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 중심은 바로 하위문화도 문화다는 강조이다. 문화의 민주화 그 단적인 예가 바로 버스킹 활동이 활발해졌는데, 당시 상상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대세로 자리 잡았다. (JTBC의 버스킹 프로그램-버스킹 본고장인 유럽편과 한국 편으로 유지되는 좋은 음악프로그램) 또한 68혁명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슬로건. 그래서 저항의 표현으로 반전운동과 문화혁명이라고도 부름, 모든 억압이나 지배와 소외로부터 해방으로 확산되었다. 이 결과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타도하려고 움직였는데, 그 영향으로 나타난 음악 장르 중 하나가 바로 자메이카 출신 ‘밥 말리’가 시작한 레게 음악이고 힙합이고... 이런 음악의 저변에는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욕구의 표출!> 이처럼 68혁명은 패션과 영화(누벨바그, 아방가르드), 미술(벽화, 그래피티), 연극(실험극, 거리극), 음악(비트, 록/펑크 음악) 등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기에 문화혁명이라고 부르며, 68혁명을 ‘상상력’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상상력을 통해 '진부한 일상'을 전복한다는 것을 본질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의 패션은 미니스커트, 꽃을 수놓은 청바지, 꽃, 실크스카프, 검은색 의상들과 특히 히피 풍의 장발과 패션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김 누리교수는 유독 한국에서 68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 배경엔 군사정권이 이를 반체재 문화라고 생각해서 억압하였기 때문이다. 장발 단속이며 치마 미니스커트 길이 단속, 금지곡 지정 등. 이웃 나라 일본은 68혁명으로 심각한 위기와 진통을 겪었다.)


그러면 코로나 이후 일어날 뉴노멀은 무엇일까?
1, 반 세계화 흐름: 세계화(글로벌화)로 내닫아 왔는데, 코로나로 인해 세계화의 부작용과 취약점이 드러나면서 차츰 반세계화로 회귀가 두드러질 것입니다. 글로벌 인적 물류 교류가 위축, 자국 생산품 강화.
2. 오리엔탈리즘의 종언(서구 중심의 세계관):과거 서양인들은 동양은 저급하고 열등하고 무능하기에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위압해야 한다고 판단한 서양의 사고방식이자 관점이다.(=식민주의 정당화의 근거로 파생함)
코로나는 이런 오리엔탈이즘의 붕괴로 <백인의 책무 종식되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은 새로운 기회, 게임체인저로 등장할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K방역 (코로나 발생하고 한동안 K방역을 무시하고 배제했지만 독일 등 여러 국가에서 이를수용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공중보건과 환경에서 게임체인저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양에 대한 열등감 붕괴로 동양을 동반자로 인식하고 협력하려고 할 것으로 보입니다. (원고를 풀어 수정하면서 붙인 제 사견입니다. 미국을 보면서 어찌 선진국이고 이상적인 국가로 보여집니까? 코로나 대체하는 모습이나 의사당 난입 등...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이라는 나라에 결코 쫄지 맙시다.)
3. 4차 산업혁명과 기본소득의 정착화
4차 산업의 가속화와 고도화 이후 불확실성 팽배해져 갈 것입니다. 곧 AI 로버트 산업의 발전으로 거의 700만개의 직업군이 앞으로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직장을 잃게 됨으로 가계소득이 감소하고, 제품 구매 불가능해지며, 많은 기업의 생존 문제 대두할 것입니다. 이 예상 가능한 사이클을 해소하기 위한 개념이 <기본소득>인데, 코로나 이전 ‘스위스에서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안건으로 국민투표 붙여졌지만 반대하였지만, 코로나로 인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미 <재난 기부금 지출>했고 대다수 국민들이 수령했습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기본소득 지급>은 한 마디로 앞으로 가장 중심적인 정책이 될 것입니다.
* 앞으로 <기본소득>은 복지 차원에서 아니라 정책 개념과 정책의 중심 아젠다로 변화될 것입니다)

*코로나 대처 방식 하나가 재난기부금을 푸는 정책을 각 나라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진으로 경제적 축면에서 보면, 이젠 신자본주의가 아니라 괴물 자본주의가 태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미국은 무려 2,300 조원을/ 독일과 일본도 거의 200조 넘는 돈을, 물론 한국도 1차 14조(40만원 수령/지방 30만원)풀었고, 2차 8조를 풀었습니다. 앞으로 이보다 더 많은 돈이 풀려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비가 오면 호수나 바다로 몰려가는 것처럼 이 많은 돈은 어디로 흘러 들어갈까요? 이런 현상으로 보면, 교황님도 우려하고 자주 표현하시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10%가 성공하고, 90%가 실패
신자본주의 하에선 1%가 성공하고, 99%가 실패
그런데 만일 괴물자본주의가 팽배하면...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 질 것이다. 이는 공동체도 국가도 동일한 패턴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 4차 산업화 시대가 활발한 몇십년 뒤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무엇을 해서 어떻게 벌까가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재화를 쓸까?>를 고민할 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겐 넘어야 할 파고가 저희 세대보다 훨씬 더 높고 강할 것입니다.

4. 개인정보와 Big Brother 시대(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차용한 개념)
-현재 한국 Qr코드 접속건수(9월까지, 저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1억4천만회.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이는 인간의 고유한 자유의 가치와 대립되고 통제 받을 가능성 농후합니다.
-이동 제한으로 여러 나라에서 저항 움직임이 일어났고 일어날 것입니다. <죽어도 좋다. 자유를 달라!!> 만약에 코로나 지속하고 심각한 단계에 들면 정부나 지자체는 아주 강력한 행정명령을 내리게 될 것이고,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고, 국민은 자유를 제한 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 K방역 초기 유럽인들이 반대하고 비난한 근거는 방역을 위해 확진자의 동선을 10분 만에 추적 가능한 것에 따른 부정적인 요인 때문입니다. 생체 감시기능(=QR코드 만듦- 식당이고 성당... 어디든지.... 물론 우리 사회는 이미 스마트폰으리 위치 추적을 동의했기에 가능했지만) 코로나가 종식되고 난 뒤에도 빅 브라더가 된 국가기관은 이를 빌미로 감시 체계는 지속할 여지가 있습니다.


&&& 코로나로 인한 뉴 노멀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만 뉴노멀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꼭 배제해야만 하는 점은 바로 신정론(theodicy)입니다. 신정론은 한 마디로 <하느님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이론을 가리킵니다. 이 이론은 신이 전능하고 선하다고 한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신에게 고통을 막을 수 있는 능력("전능")과 의지("선함")가 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왜 신이 고통을 허용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리스본 대지진 1775.11,1. 0940분 발생(=9강도)하였으며, 지진 발생 45분 후 일어나 2차례 해일로 도시 대부분 침수되고, 5일 동안 화재 발생해서 리스본의 85% 붕괴, 3만에서 10만명 사망했는데 하필 그 날과 그 시간은 바로 가톨릭 국가에서 그것도 모든 성인 대축일 미사 중에.... 그 때 가톨릭 교회가 주장했던 표현이 <재난은 바로 하느님의 심판이다.><하느님의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파하였습니다. 그러자 개신교 목사였던 요한 웨슬리는 이는 <가톨릭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루소는 리스본 대지진 이후 <자연으로 돌아가자!>, 계몽주의자인 볼테르는 교회 무너지고 사창가는 건재한 것을 보면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고, 종교란 약자들의 목발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였습니다.
* 미국의 카트리나의 헤리케인 때도, 동남아 스나미 때도 일부 개신교 목사들에 입으로 동일한 주장이 있었습니다. <재난은 하느님의 심판이다.>

* 코로나는 물론 많은 천재지변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자연과 환경 파괴로부터 파생된 예견된 인재와도 같습니다. 지구는 지금 심한 몸살을 앓고 있으며 공존하고 공생해야 하는 피조물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구원받을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8,22)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로 인한 진통이 바로 코로나이며 또 다른 바이러스가 파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후대에게 우리는 어떤 세상을 물려 줄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3개의 파도가 교회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1) Post Religious Era(후기 종교 시대): 많은 사람이 여러 종교에서 떠나게 될 것이며 앞으론 과학이 종교를 대신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의식에 엄청난 변화를...
2) Post Christendom Era(후기 그리스도교 시대): 지금껏 오래 세월 동안 세상의 중심이었던 그리스도교가 주변부로 밀려날지도 모릅니다.
(**신천지와 제일 교회 – 교회에 대한 혐오와 경계심)
다수에서 소수로 변화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남
3) Moral Hazard도덕적 해이와 더 나아가서 영의 상실은 더 심화될지 모릅니다.
이런 파고 앞에서 세계는 물론 한국 교회는 새로운 신앙과 신학의 패러다임과 뉴노멀이 필요합니다.

이런 위기와 혼란의 시기를 살아갈 우리가 찾고 살아야 할 대안을 저는 필리비 2, 5 ~ 7에서 찾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케노시스를 말하기 이전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깨달아야 하는 역사의 교훈이 있는데 그것이 바빌론 유배(**시편 137장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음악을 찾아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와 그에 따른 성찰입니다.

바빌론 유배란, <예언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경고에도 이스라엘의 상류층은 하느님을 거역하였고 결국 유배를 겪어야 했습니다. 유배란 그동안 하느님 백성이 이룬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왕정도 군대도 성전도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시온 신학’은 위태로졌으며 하느님 백성은 정체성과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급기야 일부 백성은 야훼 신앙을 공공연히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서 소수의 남은 자들, 영적 엘리트의 등장으로 유배를 통해 먼저 하느님 신앙을 집단적으로 전면적으로 다시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울타리도 없이 낯선 곳에 내던져졌을 때 비로소 하느님이 누구이시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게 되는 게 위기이지만 또 다른 영적 초대입니다. 유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대의 가장 선진국이었던 바빌론에서, 하루에도 여러 번 낯선 신들과 낯선 종교를 마주쳐야 하는 체험을 통해서 백성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일상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외부 세계에 동화될 것인지 아니면 고유한 하느님 신앙을 지켜나갈 것인지 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맞닥뜨렸습니다. (다 6,11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바라보며 하루에 세 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몇몇 선각자들이 유배 중에 한 일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정리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의 깨달음은 나라가 망하고 유배를 간 원인은 하느님께서 무력하시기 때문이 아니며,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의 약속에 충실하지 못해서라는 점을 공유합니다. 그들이 후손에게 역사를 전하는 의도는 단순한 정보의 ‘팩트 체크’(사실 확인) 전달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유산은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코로나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듣고 그 해결책을 궁구하기 위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코로나 이후, 교회가 추진해야 할 뉴노멀의 바탕과 핵심 주제를 저는 Kenosis의 회복에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아시는 것처럼 케노시스는 에수님께서 당신의 것을 자발적으로 <오히려 다 비우신 ekenosen> 분이시다. 예수님은 비움으로 가득 채우셨으며, 낮춤으로 높이 올림받으셨고, 죽음으로 영원히 사신 것입니다. 밀려 나는 것은 힘(=영향력)이 없지만, 낮아지는 것은 힘(=영향력)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회복해야하는 움직임입니다. 스스로 낮아짐으로 오히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다워지는 것이며, 힘도 더 생겨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교회의 방향은 <공동체성의 회복과 세상으로 흩어지는 교회>로 나가야 합니다.

대면이 아닌 비대면의 세상에서 교회 역시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제와 평신도의 관계, 신자들과 비신자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고 요구됩니다. 그 지향점은,
1) 대상이나 수단으로서 신자에서 관계성 회복, 인격 중심 교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성전 중심이 아니라 신자 개개인 중요성 강조,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2) 이웃이 전교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으로 전환입니다.
3)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흩어져 삶의 현장에서 교회로 살기로 전환해야 합니다.
4) 목표지향적, 상향적 방식이 아니라 관계 중심적, 하향적 방향성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요한 묵시록 17, 16 바빌론은 악의 3위일체(=정치, 경제, 종교)로 인해 멸망할 것이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악의 삼위일체는 바로 (정치-경제-종교)를 지칭한다고 보며, 역사의 흐름을 감지하고 정치, 경제, 종교가 올바른 본래의 시스템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에 맞는 뉴노멀을 이끌어 내지 않으면, 정치-경제-종교로 인해 세상은 묵시록이 예언한 대로 종말로 이끄는 악의 주체가 될 것입니다.


%%%%% 어떻게 코로나 시기를 살아가면서, 여러분은 충실하십니까? 삶에서나 신앙생활에서나, 하느님과 가족 그리고 관계하는 모든 분과 특히 자신에게 충실하십니까? 시간이나 공간에 충실합니까?

요즘 코로나로 인해 본의 아니게 <방콕 생활을 통해>, 칩거와 은둔의 생활이 길어지면서 저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먼저 코로나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활동의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새로운 용어(100명 이상, 50명 이하와 10인 이하의 모임 자제...지금은 5인 이상 집회 금지), 자가 격리와 차단 / 공간(교회를 포함한 다중시설의) 폐쇄 / 이동 제한 / untact 비대면 강의와 회의-예배와 공연 문화와 환경의 변화
** 장기화로 인한 공포와 불안감 증가, 육체와 심리적인 건강 약화/ 특히 한국인의 코로나로 인한 불안과 걱정 지수는 세계 1위(89%), 경제 활동 저하로 인한 생계와 실업률 증가(=수입 감소 여성의 자살 비율 증가), 사회적인 문제 심각
%% 교회 주일 미사 참석율: 국민소득이 3만불을 넘었고, 코로나로 인해 전 신자 대비 주일 참석율은 아마도 20% 이내로 급속히 감소될 것으로 추정
%% 대면 활동을 하는 저희 수도회 사도직 활동에 심대한 타격: 피정 참석자들의 감소


--둘째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활동의 변화: 외부 활동 제한으로 잉여 시간 증가되었지만, 그에 대한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시간 낭비 가속화될 것입니다. 지금껏 익숙한 외부 활동 자제로 <‘할 일이 없다는, 할 수 없다는 의식>이 주어진 시간을 헛되게 낭비하게 되면서.... 게으름을 조장하고 무의미와 무력감으로 보낼 소지가 농후합니다. (* 이동 제한으로 방콕으로 잉여시간 증가로—상대적으로 카드 사용비 증가—넥플렉스 등, 게임 산업 활성)

$$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막말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잖아요. <코로나 걸린 것은 신의 축복이었다.> 이를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삶의 매 순간 직면하는 많은 상황과 현실은 대부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펜데믹 상황은 어쩔 수 없이 닥친 것이지만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어떻게 적응하고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자 결정이라고 봅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의미에서 코로나는 역설적으로 개인-공동체-사회-국가-국제 관계에 새로운 파라다임을, 뉴노멀을 제기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의 삶에서 가장 밀접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환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본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영원한 시간과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이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시간적이며 공간적입니다. 그 시간은 바로 그 공간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24/7’이라는 구호가 한때 유행했습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모던 리빙’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24시간,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뭔가를 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대형 할인마트, 식당이며 술집,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온라인 서비스 등 모든 것이 24시간 단위로 돌아가잖아요. ‘아름다운 신세계란 곧 쉼 없는 삶’이라고....시간은 돈이고 소비가 미덕이라고...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속도를 늦출 수는 있습니다. ’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잠시 멈춤으로, 하루 중 낮이나 밤 중에, 고요함을 회복할 때’, 우리의 시간이 탄력 있게 늘어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를 시간의 신축성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만의 방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보면서 보내는 1시간과 사람으로 넘쳐나는 대도시의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 악착스럽게 뛰면서 돌아다니는 1시간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다릅니다.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은 햇살 좋은 거실에서 벽에 붙어 있는 십자가를 바라는 시간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고, 이런 시간은 분명 숨을 고르기에 좋은 시간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시간을 확실하게 되찾도록 도움을 주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자발적으로 외로움을 선택해서 ‘고요 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코로나는 바로 이 시간과 공간의 참된 활용을 통해 삶의 모든 시공간을 영성화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있습니다. 코로나는 분명 우리가 선택한 상황은 아니지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선용할지는 바로 우리의 선택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홀로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더더욱 어느 사막의 교부가 말씀하셨듯이, <도통하는 바른 길은 암자에 항구히 머무는데 있다.>고 했는데, 저는 코로나 이전도 이후인 지금도 늘 <제 암자, 방에 머묾>에 익숙해 왔기에 시간과 공간 적응에 있어서 큰 불편과 힘듦은 없습니다. 저희 창립자께서 당대의 프란치스칸들의 생활을 보면서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철저한 가난이었으며, 그래서 초기에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했음에도 <독방>을 강조한 것은 <이 외로움의 공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이 외로움의 공간에서 우리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잃어버린 채 살아왔지만, <한 곳에 머묾은 단지 공간과 관계가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멈춰 섬. 고요함을 즐김으로써 시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껏 우리는 늘 시간이 없다고, 바쁘다고 입버릇처럼 입에 달고 살아왔는데, 공간에 온전히 머묾을 통해서 시간을 얻게 됩니다. 머물면 어디에나 널려 있는 시간을 그냥 가져다 쓸 수 있게 되는데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가 가져다 준 의외의 선물이자 축복이기도 합니다. 멈추면 보입니다.

예전 M.E 주말 발표 <자신에 대한 나눔 시간>에, 저는 저 자신을 소개할 때 ‘충실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를 맞으면서 어제를 되돌아보면서, 특히 <충실함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많아지고 있네요. 수도 생활이란 어떤 면에서 ‘잘 살았느냐? 못살았느냐?’가 기준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수도자로 ‘죽느냐 죽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소는 바로 ‘충실함에로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제 자신에게 <나는 수도 생활에 충실했으며, 그 충실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충실이었는가?>를 되집어보면서, <참된 충실함이란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부활 강론과 지난 추석 카톡 글에서 인용한 김영민교수는 저에게 충실함을 다시 깊이 생각하도록 제 마음에 돌을 던졌습니다. 형이상학적 접근과 신앙적 접근을 하도록.... (*김영민에 대한...본질과 형상...)

%%% 교황님께서 산타 마르타의 집에 홀로 사시는 노인들에게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사도 2, 36~ 41모태로부터 불구자의 치유/요한 20, 11~18 무덤을 찾아 온 마리아 막달레나)과 수요일(사도 3, 1~10 회개하십시오/루가 24, 13~35) 미사를 집전하시면서 하느님의 충실함과 우리의 응답에 관한 강론을 하셨더군요. 이 강론은 제가 요즘 생각하는 충실함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김할 수 있는 영감을 주었기에 제 생각을 나누기 전에 먼저 교황님께서 하신 강론의 핵심을 나누고자 합니다.

교황은 그 강론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충실함의 이콘>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이어 하느님께 충실하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물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충실함은 하느님의 충실함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지나지 않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교황님의 강론 저변엔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창세기(15장)의 아브라함과 계약으로부터 ‘약속의 하느님’으로 드러내십니다. (*잠시 미사 때마다 반향되는 목소리를 한번 들어 볼까요? 10월 5/9/10일 화답송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그리고 탈출기에선, 인간의 울부짖음을 보고-들으신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자신을 다시금 약속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죠. ‘ 너와 함께 하겠다.’ (10월 6일 화답송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8일 ‘찬미받으소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이처럼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과 계약에 충실하시며,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시고,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걸으시고, 당신의 백성과 가까이 머무르시면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렇듯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구세주로 체험합니다.

사도 3,1-10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이 베드로의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라는 말 한마디로 치유됐다는 장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황은 이것이 하느님의 충실함에 대한 하나의 사례라고 강조셨습니다. <하느님은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재창조하십니다. (…) 창조보다 더 경이로운 재창조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함입니다.> 교황은 하느님이 착한 목자처럼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서는 걸 한 번도 피곤하게 느낀 적이 없다고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충실함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상으로 하십니다.> 이어 하느님은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걸 한 번도 피곤하게 느끼지 않는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면 잔치를 베풀어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충실함은 잔치입니다. 자유로운 잔치, 모두를 위한 잔치입니다.”

교황은 <너그러우신 하느님>이 당신을 거듭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 나서시는 것은(요21,15~19/나를 따라라), 이것이 하느님의 충실함이라고 언급하십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충실함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나갑니다. 우리의 충실함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선 하느님의 충실함에 대한 응답입니다.>

교황은 (사도 2,36-41 참조)를 해설하시면서, 사도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라고 선포하자 마음이 꿰찔린 듯 아파하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회개하십시오. >라고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교황께서는 ’회개한다는 것은 충실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회개한다는 것은 우리 삶이나 사람들의 삶에서 흔한 인간적인 태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의 관심을 잡아끄는 환상이나 우상이 있고, 이러한 환상이나 우상을 사람들은 뒤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환상과 우상... 돈과 권력과 명예, 욕구 등. 하지만 우리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하느님께 되돌아가야 하고 충실해야 합니다.

저는 교황님의 강론에 첨부해서 생각해 봅니다. 역대기 하권 12장, <르하브암은 왕권이 튼튼해지고 힘이 커지자, 주님의 율법을 저버렸다. 온 이스라엘도 그를 따랐다.>(2역대 12,1)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보편적인 사실이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굳건하다고, 확실하다고 느낄 때, 우리의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더 이상‘ 충실함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때‘ 나의 확신은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그런 확신이 아닙니다. 하나의 우상입니다. 바로 이러한 일이 르하브암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났던 겁니다. 그는 안정적이라고 느꼈고, 왕권이 확고해졌다고 확신했기에, 율법에서 멀어지고 우상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우상에게 무릎 꿇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은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진 않았겠지만, 마음속으로 우상들을 찾고 숭배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도 여러 번 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우상들을 향해 문을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확신을 갖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확신이 들 때 ‘나’를 그 중심에 둔다면, 르하브암 왕처럼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불충한 이가 되고 맙니다. 충실함을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 더 나아가 교회의 역사 전체가 불충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불충이 차고 넘칩니다. 이기심이 팽배하고, 하느님 백성을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며, 충실함과 신실함의 은총마저 잃게 만드는 자기 확신이 넘쳐납니다. 우리 중에도, 인간관계에서도, 충실함은 분명 값싸게 얻을 수 있는 덕목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충실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의 <회개하십시오.>라는 강조는 바로 <주님께 충실하십시오.>라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황은 (요한 20,15 참조) 마리아 막달레나를 <충실함의 이콘(icon)>이라고 강조합니다. 사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이 자신에게 해준 모든 일을 한 번도 잊지 않았던 신실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거기, 불가능한 사건 앞에, 비극 앞에서 충실함을 지켰습니다. 그녀의 충실함은 그분의 시신을 모셔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녀는 연약하지만 충실한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러한 충실함의 이콘은 ‘사도들의 사도’라 부를 만합니다.”


위와 같은 교황님의 충실에 대한 생각을 바탕 삼아,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어떻게 충실한 삶과 충실한 존재로 살아가야 할지 끊임없이 묻고 또 되물어야 합니다. 코로나 이전에 이미, 교회는 세상의 표지는 바로 <변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영성 생활의 본질은 바로 <변화>입니다. (교회는 이 용어를 대신해서 회개와 회심, 쇄신을 사용) 인간 혹 인간의 영혼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계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신 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때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 희망과 통찰이 변화되면서 우리는 우리 삶에서 거짓 확신을 거듭 가려내어, 한때 우리가 확신하고 절대적이라 믿고 살아 온 어떤 것을 폐기하고 어떤 것을 새롭게 간직해야 할 것인가를 가려내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우리가 한때 충실하다고 여겼던 것이 진짜가, 본질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예를 들면, 신천지나 제일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거점이 되자 대면 예배를 하지 말라는 행정명령이 있자, <예배는 생명이다.>며 이에 반발한 일부 교회의 성명서... 물론 일부 맞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면 예배만이 아니라 티브 미사도, 비대면 예배도 가능합니다. >
--왜냐하면 이런 비대면 예배를 통해 나와 관계된 사람들이 ‘어제와 다른 지금에 맞는 일상의 충실함으로’ ‘마음의 안심’을 얻을 수 있다면... 지금껏 절대적이란 믿고 살아왔던 대면 예배도 변할 수 있다는 진실입니다.
이런 와중에 8.21일 고태진 목사의 게시글이 화제가 되었죠. <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 모임이 칼이 되어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
*본당신부의 시선에서 본 좋은 신자란? 주일 미사 잘 나오고 활동 많이 하고 성전 신축금이나 교무금 많이 내는 신자라는 낡은 표준에서 새로운 표준으로 수정되면 좋겠습니다. 관리되는 신자가 아니라 함께 하느님께 동행하는 신자와의 관계로 말입니다.

충실함이 단지 과거를 고수하는 것이라면 이젠 타당하지 않습니다. <과거에의 충실>이라는 명목으로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참된 충실함이 아닙니다. <과거처럼 무엇을 위해 충실했나?>가 아니라 <현재 누구를 위해 충실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물론 변화는 불안하고 불편하며 그에 따른 힘듦과 위험이 뒤따른 것은 당연합니다. 가치 기준이 일원화된 세상에서, 다원화된 세상으로 변하면서 개념이 다양해지면서 당연한 것도, 확실한 것도, 지킬 것도 없어지기에 심각한 요소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미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체험— 68년 ‘수도쇄신적응’ 회칙 발표 후 수많은 남녀수도자 환속> 이렇듯 삶의 목적의식을 상실함으로써 영혼의 혼돈상태, 신원에 대한 위기를 맞으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경험이 실제로 일어났었습니다.

허나 충실함은 변화를 거부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 성직중심주의/여성차별 의식/미사나 성사 중심에서... 수도회의 규칙과 일과표나 수도복과 사도직 등 바뀔 수 있습니다. 외적인 모든 것은 변한다고 해도, 자신은 신원과 소명에 대한 내적 정의는 변치 않는 한 여전히 충실할 수 있습니다.

새삼 제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니, 저는 사실 수도자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대학진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없는 상태에서, 수녀님의 권고와 성소 웍샵에서 느낀 새로운 행복과 만족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도 생활을 선택했고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이는 수도 성소나 수도 생활의 참된 동기는 아닙니다. 물론 하느님은 인간적 동기를 정화시키고 승화시킨다고 믿지만, <하느님을 추구하고자 수도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를 전제하고 수도회에 입회해서 오롯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추구하고 자신의 삶을 통해 성공적으로 하느님을 추구할 수 있을 때 참 수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제가 반성하는 점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충실보다 무엇에 더 충실해 왔다는 점입니다. 김영민의 말처럼 본질은 없고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수도 생활의 주된 목적은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인데 말이죠. 깊은 의식 함양보다 외적 행위에 기준을 두고, 규칙을 얼마나 잘 준수했는가 그래서 미사나 공동기도에 몇 번 빠졌는가를 체크하고, 청결이 정결이며 청빈이라고 생각해서 방 검사와 옷장 정리, 몸무게 재는 일만 강조했죠. 결국 지난 양성과정은 예수님이나 복음을 위해서라기보다 수도회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교육되고 양성 받았으며, 이를 유지하고 지속하기 위해서 충실했습니다. 충실했지만 참된 충실이 아니라 조직에 충실하고 제도에 잘 적응한 것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수도자를 보면 그 수도회를 알 수 있다. 재료가 다르지만 생산 과정이 똑같기에 제품도 똑같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는 표현처럼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회 자체가 우리 구원에 장애가 된다면, 우리는 교회를 떠나야 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충실함의 정수입니다. 이 점이 바로 제가 미처 깨닫지 못해왔던 참된 충실함이었습니다. 참된 충실함은 장소의 안정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입니다. 충실함은 온전히 하느님을, 복음을 살기 위해 기꺼이 변화하고자 함을 의미합니다. 허나 저는 많은 세월 수도원에서 생활했으면서도 충실함의 개념을 왜곡하거나 협의로 인식해 왔기에, 외적으로 충실함이 충실함의 완성이라고 믿고 이를 지키는데 급급해 왔습니다.

수도자도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고, 생활도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삶은 과정이며 단계입니다. 사랑을 표현한 사도 바오로처럼, 어린이와 어른의 사랑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사랑에 대한 이해와 표현은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충실함은 상처를 입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과정을 한 번에 한 단계씩 겪으면서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과거엔, 인간 발달을 압류당한 상태에 투신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의 본질은 잃고 껍데기만 강조”했으며 순명의 이름으로 이를 통제했습니다. 성장 혹 발달 과정이 가져다준 위기에 따른 어려움 또한 삶의 과정입니다.
** 다윗은 분노와 욕망으로 가득 찬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분노와 욕망을 넘어서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나요? 우리야의 아내와 통정을 은폐하려고 술자리 향흥과 암살시도.....
** 요나는 나약함과 소심함으로 말미암아 니네베가 아닌 반대 방향으로 도망침 그리고 고래 뱃속에서 사흘 동안 시련을 겪어야 했으며, 이런 문제가 없었던 사람들보다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나요?
** 베드로: 자신의 안전과 신분을 지키기 위해 부인하고 배반 후, 스스로 환멸과 자기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수용하고 자신의 소명에 더 충실함
** 바오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처형하는데 동조하고 함께했음, 그러나 다마스커스 길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그리스도교를 전파의 초석을 쌓았으며 마지막 생의 순간까지 충실함

이처럼 충실함은 그 자리에 멈추어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향하는 하느님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있는 하느님께로 끊임없이 움직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충실함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거나 실패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가지 잘못에 멈추지 않고 하느님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것입니다.
-- 모세가 이집트인을 죽였을 때 충실한 것인가?
--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취했을 때 충실한 것인가?
-- 베드로가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 충실한 것인가?
-- 사울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했을 때 충실한 것인가?
물론 충실함이 곧 완전함과 같은 뜻이라면 그들은 전혀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충실함이 어떠한 것도 당연시하지 않고, 자기와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분투 노력하며 살아내는 것이라면, 모세와 다윗도, 베드로와 바오로는 분명 충실한 분들이었습니다.

어느 시대든,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수도자인 저나 여러분에게 있어서 충실함은 지나간 형태의 수도 생활 양식이나 신앙생활 형태에 맹목적인 맹세나 투신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충실함과 인내는 상반된 개념입니다. 하느님을 따르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면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단지 신앙으로 견디어 내고, 참고 살아가는 것은 충실함이 아닙니다. 충실함은 고통을 침묵하며 견디는 생활 양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과 하느님을 뜻을 살려고, 참된 자신의 삶을 추구하려고 할 때 그로 인해 고통스럽고 힘들지라도, 모세와 다윗 그리고 베드로와 바오로처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하느님의 보호하심과 이끄심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 맡기고 그 값을 지불하려는데 충실함은 있습니다.
** 잠시 사도 바오로의 외침을 들어봅시다. 필리피 3, 7 ~ 16

또한 충실함과 고집을 주의 깊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충실함은 이를 악물고 버티기 위해서 견디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충실해야 하는 대상은 충실하게 신의를 지키시는 하느님이심을 늘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어떤 대상 자체를 위해서 충실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충실함 자체가 우상시되고 낙담할 수 있으며, 그것은 거짓 충실함이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은, 살아 있는 것이든, 상상으로 있는 것이든 그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라는 코헬렛의 선언은 언제가 되든, 모든 것은 부서져 없어질 것이고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으로 불변하는 하느님께만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충실함의 장애가 되는 것은 완고함입니다. 변화하지 않으면서 쏟는 변치 않는 투신은 오히려 성령을 거슬리는 것이며, 성령 앞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며 이는 자신에 대한 충실함일 뿐입니다.

아울러 충실함을 저해하는 것은 바로 무성의함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몫을 다하지 않거나 기도하기를 멈출 때, 노력하지도 않고 삶에 있어서 더이상 꿈도 꾸지 않을 때, 그것은 곧 불성실입니다. 이와 달리 성령의 현존을 추구하며 성령의 이끄심에 움직이는 것은 살아 계신 하느님께 곧장 나아가는 길이며 우리는 바로 그 길이 생명과 자유를 주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 길이 참된 길임에도 더이상 믿지 않을 때, 그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불신입니다. 충실함은 위기 중에 기꺼이 견뎌내고, 진의를 파악하며,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에 그 일을 해내고자 힘써 노력하는 삶입니다. 충실함은 때때로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그것을 하지 않으면 자신답지 못하기에 계속 행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하느님이 홍해를 가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물이 갈라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물기둥을 통과해 걸어갈 정도로 충실한 점이 바로 기적입니다. 지금 코로나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역시 그런 믿음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지금 주어진 현실 앞에 좌절하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멈춰 서겠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지금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변화와 성장을 위한 기회임을 믿고 현재의 도전을 포함해 그것이 지닌 두려움을 넘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하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세상이며 우리가 꿈꿔야 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충실함은 성실하게 신의를 보이시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근본이며 뿌리인 예수님과 복음에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때입니다. 마음의 고향으로 나아가는 길에 방향이 바뀌거나 변화가 생겨도 하느님과 함께하고, 하느님 안에 머물며, 변화 속에서도 모든 변화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충실함은 우리가 익힌 판단이나 경험이 우리를 지탱하지 못할 때 우리를 지탱해 줄 것입니다.

시인 제임스 러셀 로웰은 <실패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목표를 낫게 세우는 것이 잘못이다.>고 읆으면서 삶에서 충실함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잘 표현했습니다. 무엇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충실했는가가 충실함의 기준이며 중심입니다. 만일 실패했다면 그 실패는 바로 높게 하느님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낫게 세상적인 목표를 세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제의 충실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지금 하느님께 충실하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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