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20.03.09 18:04

하느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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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보증한 고통에 대한 위로 중 하나는 이것이다. <만일 내가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변형시킨다면 고통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평온해지고 온전히 행복할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런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고 한다. 역사를 보면 많은 설교가들이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게 그런 충고를 강요해 왔다. 그런 충고가 인간의 행복을 더 증가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다른 대안들이 없을 때는 위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진, 가뭄, 전염병이 들 때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가난의 고질화, 에이즈 환자들을 보면서 <고통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드리면, 견뎌낼 힘을 받든가 아니면 하느님을 경멸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적 체념을 대신할 대안이 있다. 장 삐에르 꼬샤드는 그의 책 <거룩한 섭리에의 의탁>에서 현재의 순간 속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함께 찾아보자고 한다. 꼬샤드는 매일의 모든 행위가 갖고 있는 영적인 차원을 지적한다. 즉 우리가 수행해야 할 과제와 의무들,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 깃든 영적인 차원에 대하여. 모든 행위들은 그 순간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 주는 <성사>이다. 그러한 사실에 늘 깨어 산다는 것은 우리가 매일의 경험이 지니고 있는 거룩한 심연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고통 받을 때 특히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도전이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 도전은 우리의 영적인 자세가 바깥의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통찰을 가지는 것이다. 매우 심각한 불행 한가운데에서 조차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있다. 우리가 불운의 베일을 뚫고 어떤 변하지 않는 진실을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신앙에 의해서이다. 꼬샤드가 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옆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두 도둑의 경우를 그 예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외적인 상황은 똑같았으나, 내적인 자세는 알다시피 매우 대조적이다. 그 차이는 첫 번째 도둑으로 하여금 회한과 증오의 태도를 취하게 했고, 두 번째 도둑은 그의 조건을 넘어 영원과 만나게 된다. 꼬샤드는 단지 이렇게 주장한다. <하고 있는 대로 계속하면서 인내해야할 때 인내하라.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할 때, 당신의 태도를 변화시켜라. 그리고 이 변화는 단지 하느님이 청하시는 모든 것에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꼬샤드의 이런 주장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은 방문회 수녀들이었고, 그는 그들의 영적지도자였다. 그렇다면 그런 수녀들이 삶의 잔인함, 역사의 암흑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 때 옷을 벗기우고 단두대로 행진해 갔던 사람들은 바로 그런 수녀들이었다. 그러나 고통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 매우 우둔한 소리로 들린다. 대학살 속에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세계 무역센타 붕괴 속에? 캄보디아인들의 몰살 속에? 이런 폭격 속에? 한 아이의 고통 속에?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표현을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 말이 단순히 일어나고 있는 나쁜 일들을 합리화하는 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어떤 상황에 대한 결론이 아니라 도전으로, 모든 상황 속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도전으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뜻이란 우리의 운명에 대한 축복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오는 숨겨진 도전은 모든 상황 속에서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정의와 진리를 증언하는 방식으로 응답하라는 것이다. 영국의  여의사인 쉴라 캐시디는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 도전을 발견했다. 1970년데 초기에 칠레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었던 그는 군사 쿠테타로 말미암아 폭력적 탄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는 한 부상당한 혁명가를 치료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문을 당했고, 죄수들 수용소에 갇혔다. 수많은 정치범들이 사라져갔다. 캐시디의 경우, 국제적인 압력으로 석방되어 칠레에서 추방되었다. 회고록에서 캐시디는 고문의 힘이 자신을 두려움과 공포로 너덜너덜해진 공처럼 만들었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사람들은 일생 시달리는데, 단지 겪었던 고통에 대한 기억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존재들이 서로에게 어디까지 극한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는 고문이 그쳤을 때, 제일 먼저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울부짖었다. <철장에 매달려서 풀려나게 해 달라고 애원하며 영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자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마도 <내 빈손을 탄원보다 봉헌으로서 하느님께 뻗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나를 나가게 해주세요. 라기 보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제게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나의 무력함과 감금 속에서 남는 것이 하나있다면, 그것은 자유였다. 즉 하느님의 손에 내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자유였다.

 

이 기도의 효과는 그의 태도를 즉시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필요한 용기와 힘을 가지고 상황을 직면케 한 점차적인 과정으로 나타났다. 캐시디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 의탁의 선택은 상황의 굴레를 빠져버린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선택이며, 갇힌 사람들이 그들의 굴레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새장속의 새처럼 그들은 철창에 날개를 부딪치면서 소진되는 선택을 하거나, 감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고, 마침내 놀랍게도 그 안에서 노래 부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후에 캐시디는 영국에서 호스피스 의사로 일하면서 칠레에서의 경험으로 불치의 암환자들과 공감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환자들의 절망적인 질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나입니까?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입니까? 우리도 회한과 절망 속에서 힘을 소진시키며 철창에 우리의 날개를 때리든가, 아니면 마리아의 기도,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뜻에 따라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에 우리의 기도를 합쳐서 노래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죽음이 아니라, 이 날 그분과 함께 있는 것, 말하자면 낙원에 있은 것임을 신뢰할 때 할 수 있는 기도이다.

 

<러시아에서 그 분과 함께>의 저자인 미국의 예수회 회원 윌터 씨스체크 신부도 이와 비슷한 자유와 평온함의 경험을 했다. 그는 소련의 수용소에서 23년을 살면서 수차례 죽음과 직면했다. 그가 경험한 잔인함과 고생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가장 큰 고통은 그가 자신의 운명의 부당함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싸우게 됐을 때,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만큼 그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 자리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때에 자유와 평화를 느꼈다. 그의 시련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동료 죄수들에게 영적인 위로를 주거나, 사제직분을 수행할 때, 혹은 단순히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고통과 일치할 때에 그는 <즐거움, 하느님만 신뢰하는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신앙에 대한 확신>을 경험했다. 씨스체크 신부는 후에 상황이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을 때 실망하고 도망가려고 하는 것은 큰 유혹이라고 했다. <이런 삶은 내가 기대했던 삶이 아니다. 내가 추구했던 것은 이것이 아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셔야 합니다.’ 저는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도 이런 유혹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위로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믿는 것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의 하느님의 뜻이 아니며, 우리가 그렸던 대로가 아니고, 우리 인간의 빈약한 지혜에 적합한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이란 하느님이 계획하신 대로의 뜻이고, 매일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창조된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뜻이다. 우리에 대한 그 분의 뜻은 매일의 24시간이다.  그때에 우리 앞에 놓여 진 상황, 장소, 사람들 속에 있다. 그 순간 그분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느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이며, 우리에게 행동하도록 바라시는 바로 그것들이다.>

 

장삐에르 드 꼬사드의 주장은 씨스체크 신부의 경험으로 증명되었고, 다음의 내용이 신심적인 이상주의가 아니라 생생한 삶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고, 모든 것을 존재케 하며 모든 것을 이끄신다. 이 사실을 모든 상황과 모든 조건 속에서 식별하는 것,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뜻을 알아본다는 것은 모든 상황과 현실을 받아 드리고 완전한 신뢰와 확신 속에 자신을 그대로 맡기는 것이다. 아무것도 나를 그분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다. 그분은 모든 것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가 겪은 시련에 대해 쓰면서 씨스체크 신부는 아무런 회한이나 후회의 자취를 보이지 않는다. 그의 경험은 독특하지만, 그가 배운 교훈들은 모든 다른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우리 모두에게 구원은 매일 그리스도의 같은 십자가를 지고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매일 아침 하느님께 모든 기쁨, 모든 일, 그리고 그날의 모든 고통을 하느님께 다시 봉헌하는 것일 뿐이다.> 그는 감옥에서도, 시베리아 노동 수용소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행복의 비밀은 단순히 매순간을 목적과 책임감을 잦고 살아가는 것이었고,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 속에게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발견하기로 결심했으며 대면한 것이었다. <삶에서 신앙의 진실을 믿고 매일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는 사람보다 더 큰 평화를 알 수 있는 사람, 더 투신할 수 있는 사람, 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 모든 이야기가 너무 단순하게 보인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위하여 다만 직접 해보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해볼 때에 당신은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읽기

현재의 순간 속에서 거룩함과 행복의 길을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은 현재 순간들의 연속 그 이상이다. 우리들의 삶은 그 전체를 덮는 궁형과 같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그 이야기는 아마도 고통으로 점철된 이야기일 터이지만, 고통이 그 이야기의 주제는 아니다. 다만 필할 수 없는 질문, 즉 나의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가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대답을 얻기 위하여 먼저 우리들의 삶의 의미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순간>에 제한하여 그 의미를 찾아본다면, 우리의 삶을 하나의 전체로 보기가 어렵다. 고통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지독한 외로움, 어떤 공허감 밖에 느끼지 못할지 모른다.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고통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자로의 누이, 베타니아의 마리아도 예수께 불평했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라자로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32). 그러나 나의 삶을 계속되는 어떤 이야기로 보고 어떤 차원에서 그것을 또한 하느님의 이야기로 믿을 때에, 나는 삶의 의미가 어떤 한 순간이나 또 다른 순간 속에서 발견되는 아니며, 또한 가장 좋은 순간이나 가장 나쁜 순간도 아니며, 이야기 그 전체 속에서 발견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라자로는 죽었으나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아니며, 그의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니었다.

 

성 아오스딩은 <그의 삶을 전체>로 보았던 첫 번째 사람이다. 자신의 삶이 흩어져있는 일화들의 연속물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이며 영적인 성찰의 대상으로서, 더 깊게 파고 들어가 숙고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삶의 중추점인 회심의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본다. 이 빛으로 볼 때 그는 그를 보살피고 행복을 향해 이끄는 하느님의 섭리에 손길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손길은 하느님이 그에게서 멀리 계시다고 생각했던 도덕적, 심리적으로 방황하던 시기에도 그곳에 있었다. 하느님을 발견할 때 까지 그는 행복을 우정, 괘락, 사회적 지위, 그리고 학식에서 추구했다. 그러나 이런 추구에서 성공했어도 그에게는 슬픔과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엇인가가 빠져 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빠진 것은 확실했다. 후에 깨달았지만 그는 절대로 혼자 있은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내내, 저 멀리에서 주님의 자비는 충실하게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통이 우리를 꽉 잡을 때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현재 겪는 고통, 상실 혹은 배신이 우리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의 길이 닫히면 또 다른 길이 열리고 있음을 알아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우리의 희망과 좌절이 또 다른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확실하게 보이는 죽음이 새로운 생명의 전조라는 것을 신앙으로 배우게 된다. 성인들은 우리들의 발걸음을, 비록 우리가 가고 싶지 않은 길로 이끈다 해도, 인도하는 섭리가 있다고 믿었다. 까를로 까레또(1910-1988)는 예수의 작은 형제회 회원이었다. 44세에 그는 작은 형제회에 입회했다. 그는 그때가지 이태리의 카톨릭 청년 운동에 유명한 지도자로 활동했다. 친구들은 사막으로 가는 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부르심에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내가 원하는 것은 너의 행동과 치적이 아니라, 너의 기도 너의 사랑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하라 사막에서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보냈다. 가난, 고독, 기도의 분위기 등 그는 이 모든 것을 빨아 들였다. 그러나 깨레또는 한 가지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알프스에 작은 형제회 공동체를 만들고 산악인들을 위한 구조팀 역할을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 꿈은 눈사태처럼 쓸려가 버렸다. 사막을 걷던 도중, 그의 친구가 그의 넓적다리에 주사를 잘못 놓아서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일생을 절룩거리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까레또도 왜 이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났는지, 어떻게 하느님이 용납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는 여기에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왔는데 그 분은 나를 골탕 먹이고 절름발이가 되게 해버렸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후, 그는 그 실수가 은총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정말 운이 나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것을 은총으로 바꾸셨다.> 그는 마침내 기상학자가 되었다. <내 의사하고 상관없이 나는 내가 속한 곳에 사막이 있었다. 눈 속을 걷는 대신, 모래 속을 걷고 있다. 불운은 나에게 새로운 길을 던져 주었다.> 까레토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비탄과 절망 속에서 그를 끌어내어 새로운 수용의 상태로 데려간 은총에 계신다. 선이 악으로부터 올 때, 신앙의 눈은 그것이 하느님의 실수할 수 없는 징표라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의 발길은 고통을 우회하지 않는다. 까레또는 가난과 고통의 상처가 특별하고 매우 소중하며 달콤한 꿀을 만들어 준다고 말한다. 그것은 예수가 산상에서 선포했던 진복팔단이라는 꿀이다.

 

이 잔 모두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예수의 이야기로 조명하며, 바라보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예수 이야기의 의미는 단순히 교의와 도덕적 격언집으로 축소될 수 없다. 또한 예수 이야기의 의미는 <영광스러운 신비들>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거부, 배신, 버림받음, 외로움, 피땀이 흐르는 고통까지 포함한 이야기 전체에서 발견된다. 예수는 충실함의 기쁨과 고통이 서로 갈라질 수 없게 섞여 있다고 믿었다. 두 제자들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아들들을 하느님 왕국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 그분은 대답한다.: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마시려고 하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마태오 20,20-23)  잔을 마신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쓴 것과 단것, 슬픔과 영광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잔을 마실 수 있는가?>라는 저서에서 헨리 나웬은 잔이 삶 자체를 상징하며, 우리는 삶 안에 있는 모든 갈등들을 받아들이도록 초대되었다고 성찰한다. 잔 안의 내용물은 너무나 분리할 수 없게 섞여있기 때문에 잔을 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이 사실은 나웬이 삶에서 직접 경험한 교훈이었다. 나웬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가를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아오스딩과  달리, 청년 나웬은 이미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 속의 자신의 장래에 대해 아오스딩과 비슷한 불안감, 걱정을 느꼈다. 그는 애정과 인정에 대한 무절제한 욕구로 시달렸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내적인 공허감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나웬은 우정의 큰 선물을 지니고 있었고 가는 곳마다 공동체의 씨앗을 뿌렸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그를 한 자리에서 밀어내고 또 다른 것을 계획하게 만든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사명으로, 서커스그룹의 지도신부 등등. 그러나 대중의 인정도 있었지만 오히려 고립감만 더 깊게 해 줄뿐이었다. 그는 사막에서 예수가 경험했던 유혹들이 <더 인기가 있고, 더 강력해지며, 더 위대해지려는 것> 이었다고 표현한다.
 
1986년 그는 토론토에 있는 새벽 라르슈 공동체에 거주사제가 되었다. 그는 장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한 집에서 살았다. 그는 심각한 장애를 지닌 젊은 청년 아담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 아담은 말할 수도 없고,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담을 돌보면서 나웬은 자신에게 더 깊은 내적 회심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나웬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투쟁의 끝은 아니었다. 새벽공동체에서 일 년을 지낸 후 나웬은 오랫동안 눌러온 긴장이 극도에 달하며 신경쇠약으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 몇 달 동안 그는 거의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방을 나갈 수도 없었다. 이제 그 자신이 무력한 사람이 되어 침묵 중에 존재에 대한 확신을 울부짖고 있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나의 자기인정, 살고 일하는 나의 에너지, 사랑받고 있다는 나의 느낌, 치유에 대한 나의 희망, 하느님께 대한 나의 신뢰....이 모든 것이 > 그것은 전전인 암흑의 체험이며 끝이 안 보이는 심연으로의 추락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주 하느님이 실제인가,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일까 하는 의심으로 불안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내가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느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나를 홀로 있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났으며, 더 평화롭고 더 전체적인 사람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내면에서 들리는 사랑의 목소리>에 대한 더 깊은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그 목소리는 그를 < 나의 짧은 생의 울타리를 넘어 그리스도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는 곳>으로 초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르슈를 찾는 사람들은 처음에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공동체를 집으로 받아드리는 사람들에게는 고통만이 그곳의 유일한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곳에는 축하, 친밀함, 동료애, 소속감, 가족으로서 수용되는 기쁨이 있다. 즐거움과 슬픔은 이곳에서 서로 섞여 있다. 다시 말하면, 즐거움이 슬픔 속에 숨어 있기 때문에 분별이 필요하다. 나웬은 이렇게 표현한다. <새벽 공동체에 살면서 나는 많은 이들이 슬픔만 보는 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눈을 갖게 되었다..... 슬픔은 여전히 그 곳에 있지만 어떤 것이 나를 변화시켜서 다른 사람들 앞에 앉아 있게 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면서 공동체감을 느끼도록 해준다.> 나웬은 삶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는 나웬의 성공과 영광뿐만 아니라, 그의 고통과 아픔도 바라봐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한  이야기에 속하며 궁극적으로 은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나웬이 예수의 메시지라고 했던 메시지이다. 즉 <진정한 기쁨과 평화는 고통과 죽음을 우회하지 않고, 그것들을 정면으로 통과할 때에만 얻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이다.

 

사실과 신비

고통의 갈래는 우리 존재 깊숙이 파고 들어와 전체에 얽혀 있어서, 그 갈래를 마구 잡아당기면 나머지 부분도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진다. 우리는 비틀거리고, 넘어지며, 걷는 것을 배운다. 우리의 변화는 막다른 끝이나 실망으로 점철되어 있고, 아무도 그것들로부터 온전히 빠져 나갈 수 없다. 질병과 고통은 몸이든 마음이든 피할 수 없다. 고통은 사실이다.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그 고통을 직면하는가?> 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준수성범>에서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는 항상 대기 중이다. 그리고 어디서든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이 어디로 도망가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딜 가든지 당신은 항상 자신을 달고 가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의 대안들을 제시한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십자가가 당신을 질 것이며, 당신이 원하는 목표로 이끌어 줄 것이다. 더 이상 고통이 존재하지 않은 곳으로 ....  그러나 십자가를 기꺼이 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짐이 되고, 당신을 더 무겁게 누를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반드시 져야 한다. 한 십자가를 쫒아 버리면 또 다른 십자가 더 무거운 십자가가 당신을 쫒아올 것이다.>

 

성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동일시하면서 위로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한다. 즉 그들은 고통을 변모시키는 길을 발견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에 더 친밀하게 자신들을 연결시키고, 이웃과 더 연민어린 통합을 이룬다. 성인들은 이렇게 행복에 대하여 가장 어렵지만 가장 결정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삶의 상황에 대하여 제한된 통제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태도를 결정지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안락과 사치 한 가운데에서 비참하게 느낄 수 있는 것만큼, 성인들이 증언한 바와 같이,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행복 할 수 있다. 초기 교회 교부들은 하느님이 예수를 <미끼>로 사용하여 어떻게 사탄을 잡으려고 하는지 묘사하기 위하여 쥐덫의 이미지를 즐겨 사용하곤 했다. 성인들도 고통 중에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기 위하여 그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고통에 대해서도 말해주는 바가 있다. 덫은 튀어 오르지만 우리는 잡히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깊은 심연은 멀리 떨어진 우리의 참 나라에 있다. 그 나라는 천둥과 서리, 무너지는 빌딩의 땅 너머 요동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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