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19.10.27 06:23

연중 제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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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살아오면서 느끼는 점은 살아온 삶의 길이만큼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전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며 살아왔지만, 이제 모르는 게 더 많아지면서 숨김없이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합니다. 특히 어느 분의 집에 핀 아름다운 꽃들 중 꽃 이름을 알고 있는 꽃의 이름은 정말 소수이고, 이름을 모르는 꽃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는 제가 그 동안 눈에 보이는 꽃들하며 나무들을 관심이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증좌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누구라도 관심어린 시선으로 보면 볼수록 세부적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그러더군요. 참나무에도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가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서로 다 다르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관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다보면 변해가는 것도 보이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분이 그러시더군요. 꽃이 가장 많이 피는 계절이 어느 때인지 아느냐고요. 당연히 꽃이 많아 보이는 봄이라고 했더니, 그분의 표현에 의하면 잎이 무성해 서 잘 보이지 않아 그렇지 실상 여름에 가장 많고 다양한 꽃들이 피어난다고 하더군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듯이, 우리의 시선에 잘 드러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여름에 가장 다양한 꽃들이 피어난다고 하더군요. 이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꽃들과 나무를 구별하고 그것들의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이렇듯 꽃과 나무를 따뜻하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전혀 관심이 없는 저와 같은 사람의 시선의 차이는 바로 보이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시선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꽃과 나무의 이름 하나 하나를 알고, 그 향기를 기억하고, 화려했던 꽃 피는 시기와 언제 열매를 맺는지를 아는 사람은 분명 그 모든 시간을 통해 묵묵히 관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소리 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낸 사람일  것입니다. 꽃과 나무가 감출 수 없는 꽃의 자태와 향기를 잎과 줄기 그리고 열매에 고루 담고 있듯 아마도 사람의 자태와 향기는 더 복합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골고루 스며있어서 아무리 감싸려 해도 은연중에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꽃과 나무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다른 시선의 차이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하느님의 시선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면 그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늘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길들여져 있지만, 어느 땐가 정말 우리를 우리 자신답게 살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시선은 바로 하느님의 시선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주름과 압박에서 벗어나 하느님 앞에 본래적인 자신의 있는 그대로 서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시선과 하느님의 시선은 다릅니다. 사무엘 1권 16장 7절에 보면,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는 표현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외부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의 속모습을 바라봅니다. 단지 외형적인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보십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시선을 의식하고 자각한다면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을 좀 더 중시하며 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문득 신동협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는 시 제목이 스쳐 지나갑니다.

 

하느님은 사무엘 예언자에게 <사람의 외모나 신장 등 겉모습만을 보지 말고 마음의 중심을 봐라.>고 하셨지만, 지난 세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겉모습 곧 외모지상주의, 외제 비싼 차, 명품 핸드백이나 시계, 좋은 집, 좋은 직장, 학벌지상주의 등이 바로 이런 인간의 겉모습을 통해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해 왔지,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Lk18,9~14)은 단지 기도에 국한할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어떤 면을 더 중요시하고 관심을 두는 지 좀 더 깊이 성찰해 보도록 이끌어 주는 비유 말씀이라고 느낍니다. 나는 지금껏 사람의 시선에 맞춰서 아니면 하느님의 시선에 내 삶의 무게를 두고 살아왔는지 한번 깊이 바라볼 수 있길 바랍니다.

 

파스칼은 <세상에는 의인인줄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죄인인 사람이 있고, 죄인인줄 알지만 사실은 의인인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마다 응답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저 자신이 어떤 그 무엇을 청하는 기도는 사실 거의 해 오지 않았습니다. 허나 살아 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제가 원하는 것 보다 하느님은 늘 그 이상으로 안배해 주셨고 채워주셨다고 느낍니다. 아무튼 기도하는 존재요 삶을 살도록 예수님은 당신의 기도와 인격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혹여 하느님께 헤아릴 수 없이 오래도록 청함에도 응답받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사실 기도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는 바로 인격적인 사랑의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먼저 제 평가기준을 제시하면서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의 자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한 사람은 세리였다.>(18,10) 본보기로 제시한 바리사이와 세리는 거주지도 생활 패턴이며 학력이나 직업 그리고 사회적 신분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부류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만큼 하느님 앞에서 선 태도와 표현도 극명하게 대조적입니다.

 

바리사이의 하느님 앞에서 태도와 자세 그리고 기도로 들어난 특징에, 이미 그가 어떤 존재인지 확연하게 명료하게 잘 드러나 있습니다. 결국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 곧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긴 하였지만 그의 시선은 하느님을 향해 집중되어 있다기보다 자신에게 더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솔직하고 겸손되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보다는 <혼자말로,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8,11.12)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보더라도 기도해 온 영혼들이라면 무엇이 바리사이의 문제인지를 직감하셨으리라 봅니다. 이는 참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기도라기보다 자아도취적이고 에고중심적인 넋두리에, 자기과시에 불과합니다. 말인즉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미한다고 하지만 이를 빌미로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자화자찬이자 타인과 비교 우월감을 드러내는 비인격적인 판단이자 무시하는 언사일 뿐입니다. 진정 하느님 앞에선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고, 하느님께서 눈길을 돌리시고 손길을 거두시면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인데 그는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이 다 자신이 한 것인 양 교만과 자만에 빠져 있으며, 더 더욱 이를 토대로 가엾은 형제들을 단죄하고 심판하고 있으니 이 어찌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었겠습니까? 참으로 못나도 한 참 못난 사람입니다. 자기가 세상의 기준이며 모범인 것처럼 자기만이 옳고 깨끗하며 거룩하다는 의식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바리사이의 하나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살아왔고 살아갈 지를 말입니다.

 

사람의 태도나 마음가짐은 외적 행동이나 말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마저 <꼿꼿이 서 있었다.>는 것은 그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전라도 말로, 하느님 앞에서 대갈빡을 숙여도 모자랄 판에 대갈빡을 꼿꼿이 쳐들고 있으니 이미 그가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하느님 앞에 기도하러 올라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세리는 차마 성전에 들어와서도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18,13)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 곧 한 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인지 알기에,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에서 ‘멀찍이 서서 하느님을 향하여 눈을 들’  수조차도 없는 낮은 자세와 겸손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애모‘ 노래 가사처럼 <그대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드는가> 이 모습이 진정 하느님 앞에 선 겸손한 우리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더 더욱 세리는 가슴을 치며, 참회하고 죄를 뉘우치는 심정으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8,13)라고 참회의 기도를 바칩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성서적 기도의 첫 번째 기도는 바로 <참회, 회개, 용서를 청하는 기도>이었으며, 이는 곧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실존이며 삶이라는 자명한 현실을 말하고 있으며, 세리는 바로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하느님 앞에서 선 참 사람의 자세와 마음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며,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바로 하느님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8,14)고 말씀하심을 통해 아빠 하느님의 뜻을 전하십니다. 물론 기도는 단지 기도함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하나 됨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이 사랑을 삶으로 살고 나누는 데 있습니다. 기도는 덕행 곧 신덕을 실행함에 있습니다. 세리처럼 기도하는 영혼의 기도를 오늘 독서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구름까지 올라가리라.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집3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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