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일: 마태오 18, 21 - 35

by 이보나 posted Sep 17, 202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어느 절에서 잘못한 스님을 판단하기 위한 징계위원회가 열리게 되었고, 징계위원회를 주관할 큰 스님께서 직접 참석하셔서 그 스님의 잘잘못을 가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큰 스님은 한사코 거절하시고서는 “그를 심판하기 전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잘못을 용서해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자 회중은 “저희 역시 신중하게 내린 결론이니 큰 스님께서 직접 오셔서 시비를 가려주십시오.” 어쩔 수 없이 큰 스님은 참석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큰 스님은 행자 스님에게 살며시 금이 간 항아리를 준비하도록 하고서는, 다음 날 금이 간 항아리에 물을 가득히 채우고 손수 머리에 이고 길을 걸어 절에 도착하셨습니다. 하지만 길을 오는 동안 금이 간 항아리에서 새어 나온 물로 큰 스님은 옷을 흠뻑 젖어 볼품없이 초라한 모습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스님 어찌 된 일입니까?” 하자 스님은 항아리를 내려놓으시지 않은 채 “내가 저지른 잘못들이 내 뒤에서 떨어지고 있는데 나는 그것들을 보지 못한 채, 오늘은 다른 사람의 실수를 심판하러 온 것이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용서는 사랑의 시작이며 완성입니다. 용서는 공동체의 기초이며 토대입니다. 사람은 홀로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게 되어 있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본의 아니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용서에 인색한 공동체는 공동체 형제들 간에 유대가 약화되고 와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난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진심으로 타이르고 형제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는 한 걸음 더 나가서 “형제가 죄를 짓거든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18,22)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처럼 우리 역시 공동체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용서의 횟수를 정하려고 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형제가 뉘우치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횟수에 제한 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용서란 공동체 형제들 사이에 일어난 상처의 해답이 될 수 있으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상처받은 감정은 용서를 방해합니다. 사실 분노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나에게 상처를 주면 나는 화가 납니다. 분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의미한 신호입니다. 그래서 분노는 우리가 무언가 어긋나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정의롭고 바람직한 행동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가 ‘분노하지 말라.’고 한 강조한 것은 어떻게 하면 화를 내지 않을까가 아니라 화가 나면 어떻게 표출하고 표현할 것인가에 무게가 실려있습니다. 용서는 바로 상처를 억압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상처를 직면하면서 치유하게 합니다. 곧 용서란 우리가 분노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성심껏 대처하기로 할 때만, 우리의 삶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한한 용서의 근거란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18,33)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자비에, 하느님의 용서에 기초해야 합니다. 예수께선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용서를 이루셨고 영생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위의 예화에서 제자들은 큰 스님의 넓은 마음을 깨닫고 자신들 역시 속 좁은 마음이 아닌 큰 자비를 깨닫고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고 형제의 죄를 용서해주었을 것입니다. 제1독서 집회서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갰느냐? 인간이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28,3) 또한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같이 하실 것이다.”(18,35)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고, 그럴 때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수도원도 그렇고 여타의 신앙 공동체도 용서받고 용서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보여주고, 들려주는 기쁜 소식은 바로 용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까닭은 바로 하느님의 용서하심을 믿고, 그 용서하심을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용서할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힘도 지니지 못할 것이며, 용서하면 할수록 사랑하기가 쉬워지고,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이 건너야 할 천국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스스로 끓는 사람과 같습니다. 수도 공동체 생활에서 수도자들은 미사와 아침 · 저녁기도를 바칠 때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를 베푸는 시간을 갖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