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일 : 마태오 20, 1 – 16

by 이보나 posted Sep 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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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인력시장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거주하고 있는 안성의 작은 아파트 입구에 <인력소개소>가 있습니다. 출근 시간에 자주 인력 사무실 앞에서 하루 일할 장소로 팔려 가기(?) 전까지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노동자들 대부분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오신 분들 같더군요. 이들은 이른 새벽부터 일할 곳으로 팔려 가기 위해서 사무실 앞에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은 일거리가 없어 공치는 날인가 봅니다. 그런 날은 서너 사람이 편의점에 앉아 맥주나 음료수를 마시는 모습을 종종 보기도 합니다. 이렇듯 인력시장이나 소개소에 나왔다고 해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김도솔’이 쓴 시, 「인력 시장」을 잠시 소개하렵니다. 『별조차 얼어붙은 칼바람 새벽 거리 오늘은 행여라도 이름이 불려질까 기나긴 하루를 팔러온 푸른 수의囚衣 푸른 손    하릴없는 연장들만 무게로 짊어진 톱 망치 대패 줄자 끌 타카 먹통이며 수평의 기울기마저 꼭짓점을 잃었다 햇볕에 언 몸 녹이는 담장에 기대서서 내뱉는 담배 연기보다 한숨이 더욱더 긴 내일은 나아지리라 스스로를 속이는 하루치 주린 목을 소주잔에 채우고 웅크려 처진 어깨가 대문 삐걱 들어서는 아버지,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가 된 사람들 』 이 시를 읽으면서, 하루 일해야만 하루를 살아갈 가족의 생계유지라는 무거운 짐을 진 인력시장의 일용직 아버지들을 생각해 봅니다. 일용직 아버지의 ‘푸른 수의’는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와 함께 자신의 꿈과 청춘의 낭만을 빼앗아 간 막막한 현실을, 그런데 더 아프고 서러운 것은 하루를 팔지 못한 자신의 무용지물이 서러워 ‘하루치 주린 목을 소주잔에 채우고 웅크려 처진 어깨’가 안쓰럽게 다가옵니다. 그런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고 가장 힘든 것은 가난의 대물림으로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가 된 사람들’을 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풍요 속의 가난, 상대적 박탈감으로 좌절하고 있는 일용직 노동자들, 이 시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해도 이 시를 접하면서 이른 새벽 인력시장을 전전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을 생각하면서, 일할 곳이 많고, 일할 곳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우리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살아가고 추구하는 시장 자유주의 혹 신자본주의 논리에 근거한 경제정의 구현과 실현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고 자각하면서 바라봐야 합니다. 노·사·정 위원회가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대체되었지만 언제나 항상 대립과 갈등의 근본 문제는 바로 ‘정당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 곧 임금의 적정선입니다. 

복음에서 포도원 주인과 일꾼이 맺은 계약대로만 실행한다면(=양자 불평등하지 않은 공정한 계약을 전제로), 빨리 온 일꾼이나 늦게 온 일꾼이 같은 품삯을 받는 것이 예수님 당대에도 지금도 합당하고 정당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계약한 대로 나중에 와서 적게 일한 일꾼과 먼저 와서 종일 일한 일꾼에게 계약한 대로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데, 그때도 지금도 왜 문제가 될까요? 포도원 주인의 다음 말씀,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20,15) 표현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에선 세상의 이치와 상식 그리고 세상의 셈법이 임금의 척도가 아닙니다. 복음에서 하루 임금賃金은 하늘나라의 이치와 상식 그리고 셈법을 바탕으로 지불했을 뿐입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입니다.”(20,15~16) 더 나가서 이사야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오늘 복음을 이해하고 접근해야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치고자 하신 바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55,8) 하느님은 항상 존재를 말하고 존재에 관심을 두지만, 인간은 언제나 소유를 말하고 소유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하느님 생각과 우리 생각, 나의 길과 하느님의 길 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 복음은 포도원 주인의 ‘선한 마음’, ‘자비’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세상의 일터가 아닌 하늘나라의 일터에선,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일하고 듬직한 일꾼을 한 차례 부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저녁까지 일꾼이 필요하기에 늦은 시간까지 일꾼들을 부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포도밭 주인은 일꾼을 부르러 이른 아침에 그리고 9시, 12시, 3시, 5시에도 나갑니다. 무려 5차례나 일꾼들을 부르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냅니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 시간이란, 시계의 시간이라는 한계와 제한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하겠지만 시공을 초월하신 하느님의 시선에서 별 차이가 없는 늘 현재, 지금일 뿐입니다. 세상 어디서나 서열이 있고 입회와 입사 연도에 따라 선임과 후임 등 여러 요건에 따라 다른 대우와 대접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그로 인한 불공평과 불평등, 불통과 불목, 불화가 지배하지 않은 세상, 곧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길 원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세상의 일을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에게만 일자리를 주는 주인들과 달리, 시간과 상관없이 일자리가 필요한 모든 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일자리와 일할 기회를 주신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호의와 배려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경륜의 관점에서 보자면, 구원사의 시작부터 심판과 종말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은 세상에서 당신의 일을 할 일꾼을 부릅니다. 이처럼 하늘나라의 일이란 세상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지속적이기에 그때, 그때마다 일꾼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로 하늘나라 일터에선, 세상적인 일터와 같이 먼저 온 사람부터 품삵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 먼저 임금을 지불합니다. 또한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 모두 똑같은 품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희 수도회뿐만 아니라 모든 남녀 수도회에서 회원들의 용돈은 입회와 서원 연도와 상관없이 다 똑같은 금액을 받습니다. 이렇게 먼저 시작하고 나중에 시작하는 것과 상관없이 동일한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하늘나라가 지향하는 비전이고 실현해야 하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표현 속에, 그리고 하느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표현과 가르침에 이미 내포되어 있고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까닭이고, 그 실례는 바로 마르코 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12, 1~12)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이란 우월감과 기득권에 집착한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먼저’가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과 보잘것 없는, 가난하며 병들고 나약한 이들이 우선적으로 초대받은 구원의 수혜자들입니다. 구원은 은총이며 율법이 아닌 사랑입니다. 선한 포도원 주인이 주는 품값은 단지 하루 품값이 아닙니다. 일할 곳이 없고 일할 수 없는 처지와 같은 ‘푸른 수의’를 입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단지 하루 품값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넘어 한 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루의 위로가 아니란 영원한 안식을 베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랜 시간 더 많이 일한 일꾼에게나 짧은 시간 덜 일한 일꾼에게 똑같은 품값을 줌으로써 오랜 시간 일한 일꾼들의 수고를 무시하고 그로 인해 상처를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시선에선 많이 오래 일한 것이나 짧게 적게 일한 것은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더 주고 덜 주고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은총론을 강의하시던 신부님의 표현처럼, 큰 댓병이나 작은 소주병은 이 땅에선 크고 작은 차이가 드러나지만, 하늘나라에선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모든 이가 다 만족(=그릇만큼 충만했기에)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선 다 똑같은 크기이고 동일한 무게일 겁니다. 다만 하늘나라에선 세상의 생각과 방식과는 달리 ‘우선적 사랑’이 작용하는데, 그것은 편애가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이 우선적으로 세상에서 더 고통받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먼저 눈길과 손길이 향한다는 점입니다. 구원도 그렇고 은총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먼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정에서 부족한 자녀들에게, 공동체에서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먼저 시선이 가고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밀지 않나요. 자비하신 하느님은 그런 면에서 우리보다 한층 더 엄격하고 철저하답니다. 그러기에 포도원 주인의 입을 빌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비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듯 이렇게 토로하십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요” (20,13.15) 결국,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존재에 관심을 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때문임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소유에 집착하는 인간의 시선이나 생각에서 벗어나 존재에 관심을 두신 하느님의 자비의 시선과 생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란 임금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먼저 온 일꾼이나 나중에 온 일꾼에게 동일한 사랑과 은총을 내려 주신 하느님의 넉넉하고 후한 자비에 감사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다짐합시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복음환호성, 사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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