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일: 마태오 23, 1 - 12

by 이보나 posted Nov 0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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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제가 함께 살았던, 호치민 국제공동체에서 가장 큰 이슈는 호칭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한 “이 세상 누구도 스승이나 아버지나 선생으로 부르지 마라. 너희의 스승이자 선생은 오직 그리스도뿐이고, 아버지 역시 오직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시다.”(23,8.10.9.참조)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도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강조하는 신부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저는 입회와 서원 그리고 서품 연도로 볼 때, 예수고난회 한국 관구 회원 중에서 제일 연장자입니다.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지만, 일찍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서품을 빨리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개방적이어서 굳이 호칭에 신경을 쓰지 않고 편안하게 불러 주기를 바라지만, 대부분 형제는 몇 년 혹은 몇 십 년을 함께 살았지만도 아직도 저를 부를 때 깍듯이 ‘아오스딩 신부님’하고 부르며, 어떤 형제는 편하게 ‘아오스딩 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직도 유교적인 예의범절이 남아 있는 베트남 학생들에게 호칭으로 부르지 말고, 제 이름만을 부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렇게 호칭할 학생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도, 유교 영향권에서 나고 자란 베트남 학생들 가운데 아무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이제 20대 젊은 친구들이 자신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원장과 양성장 신부를 향해서 호칭은 생략하고, ‘하이 제프’, ‘하이 아오스딩’ 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그리고 여러분도 ‘ OO 신부님’하고 호칭을 부르지 않고 본당 신부님을 향해서 ‘분도 안녕’, ‘베드로 안녕’하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불리는 호칭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고 어떤 삶을 사느냐에 더 무게가 있다고 봅니다. 호칭을 부르는 사람 보다 호칭을 불리운 존재의 삶의 무게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강은 깊을수록 소리가 작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벼는 익어갈수록 속이 낟알로 꽉 차게 되고 꼿꼿하던 이삭이 고개를 낮추게 됩니다. 또한 상류에서 졸졸 소리 나던 개울물도 하류의 깊은 강에서는 잠잠히 흐르게 되지요. 그러면서도 수많은 물고기와 생명을 품고 묵묵히 바다로 흘러갑니다. 이러한 속담에는 인격이 높은 사람일수록 남 앞에 겸손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사람이야말로 이 땅이 필요로 하는 참 열매를 맺고 세상에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제 수련기 동안 그리고 제가 수련장으로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거나 사용한 단어는 겸손·이탈·희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순명한 수도자들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듣고 인용도 하였지요. 

성 아우구스티노는 겸손에 대한 가르침을 누구보다 자세하게 펼쳤습니다. 그에게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고 참된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하루는 아우구스띠노 성인이 볼일이 있어서 한 제자를 불렀습니다. 『 ‘이보게, 레이나.’ 스승이 부르는데도 레이나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옆방에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해 불러 보았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었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이 녀석이...’ 그는 옆방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혔습니다. 순간, 그는 ‘아차’ 하고 뉘우쳤습니다. 레이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간절히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 보니 스승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제자에게 간청했습니다. “너의 발로 내 목을 밟고 서서 ‘교만한 아우구스띠노야, 교만한 아우구스띠노야, 교만한 아우구스띠노야' 이렇게 세 번 소리쳐다오.』

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코는 세상 맨 끝자리에서 가장 겸손한 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맨 끝자리를 이미 예수께서 차지하셨으니 자신은 맨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만족해야겠다고 농담 삼아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성인들의 겸손함을 들으면서 저도 그들처럼 겸손하게 순명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제 삶을 되돌아볼 때, 남 못지않게 순명해 왔으며 참회와 고신 극기에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고 남에게 뒤지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겸손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사실 정말 겸손한 사제나 수도자들을 만나기가 힘듭니다. 예전 신문에서 오려 둔 것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희 본당 신부님이셨던 광주대교구 ‘김정용 안당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안당 신부님은 본디 겸손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지요. 그런데 자신의 삶을 마지막 정리하는 사제 수품 50돌 축하식에서, “무릇 사제란,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겸손한 사람이어야 합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분은 참으로 겸손한 삶을 살아오지 않으셨던 분이셨지만, 자신의 50년 사제의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후학들에게 ‘겸손하고 기도하는 사제’로 살아가도록 권고하신 것으로 저는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자리는 어디이셨지요. 그분은 허름한 마굿간에서 태어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십자가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분의 자리입니다. 가장 낮아짐으로써 가장 높아지셨던 예수님의 자리는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의 옆자리였죠.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지금도 앉고 싶어 하시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서열이나 외모보다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겸손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 자신을 주위의 관심을 끄는 흥미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 나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것, 나를 중심적인 존재로 세우는 것을 모두 포기하게 하는 겸손은 하느님을 향해 우리 자신을 개방하게 하고, 하느님의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게 하고 하느님의 시선에서 자신을 깨닫게 합니다. 

흔히 자신을 낮추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는 일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잠깐 낮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조만간 누군가 다가와 더 높은 자리로 앉힌다고 한다면 낮은 자리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정작 어려운 것은 사심없이, 아무런 기대도 없이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인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자신을 낮추는 일이 어려운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겸손한 사람으로 보아주기를 바라면서 자신을 낮춘다면 그것은 기만일 뿐입니다.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은근히 겸손한 척하기 위해 취하는 겸손은 참된 겸손이 아니라 위선적인 겸손, 곧 교만입니다. 누군가 자기를 좀 더 높은 자리로 데리고 갈 것을 기대하면서,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로 옮기는 자신을 바라볼 사람들의 선망의 눈초리를 기대하면서 애써 낮은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23,1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심없이 네 자리를 찾아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 말라키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명심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리겠다.”((1,1,2)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아야 합니다. 어차피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불손한 겸손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드러내는 순수한 겸손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자신과 하느님을 속일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의 눈에 보여지는 겸손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하느님께 인정받는 겸손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생각이시지요!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나이다. 제 눈은 높지도 않사옵니다. 감히 거창한 것을 따르지도, 분에 넘치는 것을 찾지도 않나이다.”(시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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