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주일: 루카 14, 1. 7 - 14

by 이보나 posted Aug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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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어떤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삼척이 어디에 있는 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자들이 일제히 ’강원도‘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틀렸습니다. 삼척은 여러분들 마음 안에 있습니다. 잘난 척, 있는 척, 아는 척하는 이 세 가지가 바로 삼척입니다.”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새삼스럽게 기억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 곧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며, 예수를 주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신앙인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또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합니까? 방금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는 한마디로 낮은 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앙인들이란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자기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마치 자기가 그 잔치의 주인공이나 되는 양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거만하고 오만스러운 인간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겸손한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도 윗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예수님은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참된 겸손이 어떤 것인지를 묵상하고 우리도 진정으로 겸손한 신앙인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수도자나 사제로 살아오면서 극기를 잘하는 사람은 많이 보았습니다. 저도 참을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도 그렇지만 겸손한 사제나 수도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일이 겸손입니까?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비굴하게 낮추고, 그것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겸손일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계산된 마음으로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행위도 겸손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만함이며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성 아오스딩에 의하면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고 참된 자기 인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겸손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아는 것, 하느님의 시선에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주제 파악을 잘하는 것, 분수를 아는 것이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표현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겸손의 첫걸음이며,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직한 마음으로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랬을 때,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나는 내가 앉을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분간하게 됩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앉아도 되는 사람인지, 아니면 낮은 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자기의 행동이 어떠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따라서 겸손의 첫걸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로 바라볼 수 없고 그런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가정에서, 이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가 어디이며,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압니다. 터무니없이 비굴하게 자기 자신을 비하하면서 해야 할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이일 저일 온갖 일을 간섭하는 사람, 아무런 협조도 하지 않으면서 뒤꽁무니에서 남을 헐뜯기나 하는 사람,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면서 형제들을 비판하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또 자신의 위치와 그에 합당한 처신을 하지 않는 오만한 사람이 많은 곳에는 늘 미움과 싸움과 분열과 불화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만 합니다. 더불어 사는 것을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우리 가정이 그렇고 우리 사회가 그렇고, 우리 교회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소속한 모든 공동체가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려면, 그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자면, 가정 공동체 안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혹은 자기가 어떤 생활을 할지 분별하지 못하고, 또 남편으로서의 자신의 위치, 아내로서의 자신의 위치, 자식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 가정 공동체가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잘나고 똑똑한 남편, 잘나고 똑똑한 아내, 잘나고 똑똑한 자식들만 있는 집안은 얼마 못 가서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공동체만 그런 것이 아니겠지요? 주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설 자리 앉을 자리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오만한 사람이 많은 그런 본당 공동체는 늘 말썽과 불화와 분열 속에서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이란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이며,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며, 나의 설 자리와 앉을 자리를 구별하는 것이며,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 겸손이 또한 모든 공동체를 사랑과 일치로 이끌어 주는 가장 기본적인 덕입니다. 겸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덕이지만, 동시에 하느님 자녀답게 사는데, 또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본적인 덕입니다. 겸손은 자기 수련을 통하여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체험함으로써 터득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목적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으로 변화시키고, 인간을 들어 높입니다. 루카 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절망과 비참 가운데서 비로소 자기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됩니다.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깨달은 작은아들은 그때 눈이 뜨여서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자기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용서를 청하리라 마음먹게 됩니다. 본인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된 그는 겸손해져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회심하여 새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 맹사성이라는 유명한 재상이었던 분이 파주 군수로 재임하던 때 한 고승을 찾아간 일화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스님의 가르침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이 든 맹사성은 그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려다가 그만 방문에 머리를 찧고 말았습니다. 그때 스님이 조용히 이렇게 한마디 했다고 합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답니다." 그렇습니다. 머리를 숙이면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꼿꼿이 머리를 세우고 상대방에게 숙일 것을 요구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줄줄이 부딪히게 되지요. 삶이 힘들어집니다.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서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되기 위해서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끝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시작이자 바탕입니다. 끝으로 오늘 우리가 들은 집회서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보도록 합시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 (3,17-20.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