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일: 루카 14, 25 – 33

by 이보나 posted Sep 0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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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우리는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신다.”는 표현을 통해 우리의 영적 순례는 다른 어떤 곳이 아닌 우리가 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우리네 삶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신앙생활이란 현재 있는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 추종의 영성의 밑뿌리는 성서이며, 성서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기초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되돌아갈 때, 복음은 영성의 중심이 바로 예수 추종임을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예수 추종은 모든 영성의 모태이고, 예수 추종은 모든 영성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과 추종의 길은 수많은 길 가운데 그저 한 길일 따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는 오직 유일무이한 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추종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 ‘떠남과 버림, 이탈과 포기’를 요구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앞서 지난 목요일 복음(루5,1~11)에서,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아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하자,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받고 그 초대에 기꺼이 응했습니다. 그들은 버릴 것을 단호하게 버리고 옹골지게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옛 삶의 질서와 방식을 단호히 버리고 내려놓았다는 의미이며, 이로써 옹골지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추종은 한때가 아니라 전 생애를 거쳐 단호하게 버리고 옹골지게 따르는 삶의 반복적이며 지속적인 일입니다. 이런 바탕에서 오늘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걷는 이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참된 제자의 조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7), 그리고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33)고 말씀하십니다. 도덕경 7장에서 노자도,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 나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완성하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지금의 자아(=self/소문자)가 죽어야 참된 자기(=Self/대문자)로 거듭날 수 있다는 진리를 말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르8,3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제자의 길에서 ‘버리고 짊어지며, 짊어지며 죽는 것’은 참된 자기로 거듭나서 생명을 생명대로, 진리를 진리대로 살아가면서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짊어지고 버리면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 부단히 자신과의 싸움의 과정은, 참 제자가 되어가는 영적 여정이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되는”(갈2,20) 정화와 조명 그리고 일치의 순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추종하려는 제자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14,33.26참조)고 하였지만, 다른 복음과 함께 연계해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바로 ‘자기를 버리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으며, 이는 곧 거짓 자아와 자기중심적인 망상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예수님의 어리석음과 자기 비움의 삶에 견주어 보면 인간의 헛된 탐욕에 불과하며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오늘 독서 지혜서는 이를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9,14.15)라고 그 헛된 탐욕을 경계하라고 권고합니다. 거짓 자아를 빛내려 하고 드높이려는 모든 욕망은,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이 반드시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적인 나는 거짓 자아요 무질서한 탐욕 덩어리인 허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중심적인 생각만이 아니라 가족 혹은 집단 이기주의적인 생각은 언뜻 합리적인 것 같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과 하늘나라의 시선에서 보자면 지엽적인 생각이며 조급한 생각이기에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6) 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버림과 비움’의 삶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걸음을 멈추게 하고 뒤를 돌아다보게 하는 우리 자신의 무질서한 욕망들, 어리석은 기대들, 잘못된 습관들을 내려놓고 비울 때만이 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울 것입니다. 온갖 형태의 자기중심적인 생각의 틀을 깨지 않으면 타자 중심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버림과 더불어 예수 따르는 제자들이 반드시 짊어져야 할 짐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14,27)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의 자기 십자가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예수님의 관점에선 살펴보자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사랑의 표징이자 타인 구원의 도구이었잖아요.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새롭게 예수님을 따르면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란 단지 자기를 위한, 자기 구원을 위한 십자가만이 아니라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나 아닌 타자’를 위한 십자가이어야 한다고 느껴집니다. 곧 타인 구원을 위한 희생의 십자가, 나 아닌 너를 위한 내 수고의 십자가, 나 아닌 우리와 나 아닌 생태계 회복과 상생을 위한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따라야 한다고 느낍니다. 새로운 십자가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피조물과의 연대’를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기꺼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이는 나의 몫의 멍에입니다. 이 십자가는 타협하고 협상할 성격의 멍에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짊어져야 할 멍에로 여기는 것이 참된 제자의 마음이며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사도 바오로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9,10.12~17)가 너무도 감동적이기에 제 마음에 와닿습니다. 노인인데다 수인이 된 바오로가 옥중에서 얻은 아들 오네시모스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할 수도 있었지만, 자기중심적인 편함과 집착에서 벗어나서, 그를 필레몬에게 보내면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오네시모스에 관한 처분(=종이 아닌 자유인)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비우지 않고 어려움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예수님을 따라왔던 어제처럼 오늘 본인의 삶에 이미 익숙한 비움과 내려놓음, 그리고 오네시모스를 보내고 겪어야 할 어려움을,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인 결단과 그 모습에서 오늘 우리의 제자 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숙연하게 합니다.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지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