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일: 루카 16, 19 - 31

by 이보나 posted Sep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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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한두 번쯤, 나에게 혹시 어떤 불행이 닥친다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고 고민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걱정 때문에 밤을 지새우고 몸과 마음이 아픈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고 나면 이런 걱정들이 대부분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고 피식 웃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연한 걱정,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을 핀잔할 때 우리는 괜한 기우라는 말을 씁니다. 기우란 말은 중국 고전인 '열자'의 '천서' 편에 나오는 기인지우杞人之憂의 줄임말로, 기杞나라 사람이 쓸데없는 걱정憂을 한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에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그래서 걱정도 팔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저것 걱정이 많은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걱정이 많은 까닭은 대범하지 못하고 소심한 표시이고, 욕심만 많고 낙관적이지 못한 표시입니다. 신앙적으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렇게 걱정이 많은 사람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왜 걱정을 하느냐, 믿음이 약한 사람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마태6,25.27.32) 물론 걱정은 인간의 현실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기에 다만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집중하고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인간은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비워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모스 예언자는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왜 불행할까요? 자신을 위해서는 걱정하지 않아야 하지만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서는 걱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문제란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저 또한 자주 왜 걱정하십니까? 하느님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이 자매님보다 자식을 덜 사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믿지 못하십니까?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사랑이시라는 것을 왜 믿지 못하십니까? 라고 책망 아닌 책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물으면 어머니들은 ’하느님을 믿습니다만‘하고 말꼬리를 내립니다. 물론 믿음이 부족하기에 걱정하는 분도 있지만,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걱정은 사랑의 운명입니다. 걱정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랑하면서 걱정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듯이 보입니다.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염원입니까? 잘못되기를 바라고 불행해지길 바라는 염원이 있습니까? 염원은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 좋은 일이 생길까 걱정하지 않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부모는 믿어도 지금 당장은 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선을 감당해야 하는 자식을 생각하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걱정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염원이고 사랑의 염려입니다.

제 어머니는 저를 따라서 영세 후 제가 걸어가는 수도 생활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늘 걱정스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제가 된 이후 교구 사제 부모님들과 만나시고, 함께 어울리시면서 걱정 아닌 걱정이 늘어나셨습니다. 사제가 된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제가 된 이후 환속하신 신부님들의 부모님들을 만나시면서 혹여 저 또한 수도원을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와 걱정으로, 당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저에 대한 걱정으로 맘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자식에 대한 걱정처럼 때론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과 힘듦을 보면서 걱정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걱정은 사랑의 격한 표현이고, 처절한 기도라고 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는 것은 내 배만 부르면 다른 사람이 굶주리건 말건, 병들건 말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닌 누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요, 자기 아닌 누구에 대한 아무런 염원도 없고 그래서 염려도 없는 것이요, 사랑 없음은 물론 미움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제1독서 아모스에선, 『걱정없이 사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걱정과 염려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불행한 것입니다. 걱정과 염려가 없어 편안한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온갖 걱정과 염려가 불안하게 하여도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라자로와 부자는 이런 행불행의 극명한 예입니다. 누군가가 사랑의 시작은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누군가를 바라볼 때, 즉 나의 모든 방향이 그곳에 향해 있을 때 그 누구든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보지 않는 무관심으론 누군가를 품을 순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았다.』(16,22)라는 표현을 단지 일차원적인 상선벌악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어떤 면에서 죽음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이 비유를 통해서 지금 여기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는 게 참된 인생인가를 물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자의 때늦은 후회는 바로 삶을 살면서 시선이 주변보다 자신에 집중하다 보니 무관심과 무감각 곧 삶의 고뇌하는 주체보다 제3자적인 방관자의 시선과 삶의 태도에서 파생한 것입니다. 사실 부富란 그 자체가 선이 아니듯, 역시 악도 아니기에 부 자체가 그 부자의 불행의 원인일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아모스가 질책한 것처럼 그 부자는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살았던 사람이었으며,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사람” (6,1.6)이었기 때문에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 왔으며, 그 흥청거림이 끝난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에게는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무감각으로 대표되는 구경꾼적인 삶의 태도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라자로라는 거지가 자기 집 대문 앞에 있었던 것도 그의 관용 때문이 아니라, 거지의 존재 자체를 신경이나 관심조차 두지 않은 극단적인 무관심과 무감각에서 나온 행동이요, 또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도 애덕의 산물이 아니라 남은 음식에 대한 무관심의 산물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 개들이 종기를 핥는다는 표현도 결국은 부자의 무감각을 드러내고, 어쩌면 이러한 삶이 물질적 부를 가능하게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을 이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부자의 무관심이 그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부자의 모습은 옛날의 어떤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남이야 어떤 처지에 살아가고 있든 자신만 잘 살고 마음 편하면 된다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의외로 많은 사람이 부자와 같은 삶의 태도를 당연시 받아들이고 있음이며 이런 의식이 점차적으로 사회 전반에 팽배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타인의 프라이버스를 존중해 준다고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현상에서 때론 주위의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이러한 관심에서 출발하는 사랑이라는 회개의 삶이 바로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들어 알고 있지 않나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갇혀 있을 때 찾아오지 않았다.” (마태25,42)고 추궁하실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무관심과 무감각이 바로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라자로를 바라봅시다. 무관심으로 닫혀 있는 시선이 아니라 바라봄으로써 품을 수 있는 사랑을, 주변의 라자로와 같이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주님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시1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