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심재(心齋) 로서 예수성명기도

by 후박나무 posted Aug 13,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기대했던 태풍 ‘야기’ 가 중국 쪽으로 방향을 틀은 덕에 폭염과 높은 습도는 당분간 더 지속될 전망이다. 가난한 이들이야 언제나 있겠고 그들의 삶이 언제는 쉬웠겠냐마는 세월이 갈수록 사는 일이 더 고달파지고 서글퍼지는 듯하다.

 

인생은 70 근력이 좋아서야 80, 그나마 우리의 세월은 눈물과 한숨 속에 나는 듯이 가버리나이다. 주여 날 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우리 마음이 지혜를 얻게 하소서.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꽤 되니 불현 듯 떠오르는 지난 일도 웬만하면 2~30년 전 일이더라. 지금은 농촌인구의 감소로 학생이 없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강진 성. 요셉 여고 졸업미사때의 강론 모티브를 침묵피정에 맞게 각색하다.

 

작금의 고령화 시대를 당대에 적용해 본다면 갑자기 튀어나와 유명해진 예수는 비교적 젊은 오빠라 할 수도 있겠다. 그의 프로필을 대충만 흩어보면 예나 지금이나 대학물이라도 좀 먹지 못했으면 사람취급도 못 받던 사회에서 대학은커녕 글을 읽기는 했지만 쓸 수도 있었는지 확실치 않을 정도로 정규교육과는 별 인연이 없는 짧은 가방끈에다, 출신배경은 서울 강남은 고사하고 강북도 아닌 저 강원도 횡성 정도라 할 수 있는 나사렛 출신의 시골뜨기였다.

 

그런 그가 30이 다 되어 ‘하느님 나라’ 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 인기가 대단하였다. 해외유학을 다녀오고 신학박사학위를 몇 개씩 가진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보다 더 쉽게 사람들의 피부에 와 닿는 하느님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정규교육이란 미명하에 기존질서와 특정계층의 특권을 고착화하고 정당화 하는 프레임에 갇힌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을 설파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 구현하는 진정한 ‘아들’ 로 여겼다.

 

로마제국의 식민지로서 어느 정도 종교적인 자유와 자치권을 부여받은 유다의 지배자들이(헤롯당, 사두가이, 바리사이, 율법학자등) 볼 때 예수는 일시적인 위험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이나 특권, 사회적인 지위를 지탱하는 지반을 허무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들이 누리는 이 모든 특권들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다” 라는 특정한 해석에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예수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고 전면 부정하여 지반을 허물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실력자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해오면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다루는 노하우를 축적해왔다. 예수는 회유될 성질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전에는 자신의 일을 중도에 포기하고 타협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형상화를 시도한 주제다. 예수도 자신이 하는 일을 계속해 나간다면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임을 미리 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죽게 될 미래를 받아들이며 자기의 생명을 많은 이들의 죄 사함을 위한 희생 제물로 바친다.

 

그리고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그와 가깝던 몇몇 사람들이 죽었던 그를 만나고는 생전에 그가 했던 일을 이어서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다.

 

물론 삑사리가 나기도 한다.

“미국 상원의 채플 목사였던 리처드 핼버슨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대형교회의 세습을 비판한 영화 '쿼바디스'의 김재환 감독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교회는 한국으로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 부부의 아들로 중국에서 태어나 대학교육을 위해 미본토를 처음 밟고 후일 유명한 종교학자가 된 휴스턴 스미스는 그의 명저 ‘세계의 종교’ 1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기의 친구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상해 본다. 예멘인인 유대교 친구는 지금 이 시간에 몸을 앞뒤로 흔들며, 시나고그의 마룻바닥에 앉아 기도를 할 것이고, 무슬림인 터키 친구는 라마단을 막 끝냈지만 하루 5번 메카를 향해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있을 것이다. 히말라야의 발치 갠지스 강의 발원지에 가까운 사원에서 침묵을 지키며 살고 있는 스와미 라마 크리슈나, 또 바로 그 시간 수많은 대표들과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랭군의 수상은 그보다 먼저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개인경당에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랭군의 수상보다 훨씬 먼저 깨어 침묵의 선 수행을 하고 있을 도쿄의 선사친구들. 스미스는 종교와 신념은 다를지라도 이들 모두의 공통분모를 영원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데서 찾았다. 그들의 공통점을 나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시간이란 유한한 틀 속에서 영위되는 그들의 삶 또는 인간역사가 유효하고 유의미하려면 영원이 그 위에 포개져야 한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일상 중에 시간의 덫을 탈출하여 영원에 접속될 때 일상도 영원도 다른 차원의 비전을 갖게 되며 제 색깔과 제 모양을 갖추게 된다. 그 영원이라 불리는 실재는 생수, 마르지 않는 샘, 사랑의 바다, 하느님의 현존, 존재의 근거등 여러 비유로 일컬어진다. 처음 그 물을 길으려면 오랜 시간 먼 곳까지 가서 힘들여 물을 떠 돌아오지만 가져오는 양은 미미하다, 북청 물장수처럼. 하지만 실상을 깨닫고 하느님의 현존에 드는 일이 일상이 된다면 봉이 김 선달처럼 대동강 물을 팔게 될 것이다.

 

시간의 덫에서 놓여나기 위해,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기 위해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필요한 조치중 기본은 단식과 기도다. 동방교회에서는 배부른 상태에선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말라는 금언이 있다. 음식의 단식도 필요하지만, 마음의 단식도 수반되어야 한다. 아무 생각도 안하는 것이 최상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므로 한 가지 생각만 하며 마음의 단식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런 心齋의 구체적인 시례는 동방정교회 영성을 집대성한 Philokalia를 소설식으로 흥미 있게 서술한 “이름 없는 순례자” 란 책이다. 여기서는 주로 예수성명기도를 하는데, 이런 방법을 통하여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려고 기다리고 계신 그 현존의 차원으로, 영원에 접속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