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파스카 성야

by 언제나 posted Apr 2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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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사제는 부활초에 새 불을 댕긴 후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외칠 것이며, 우리 모두는 힘차게 <하느님 감사합니다!>고 노래할 것입니다. 이렇게 어둠을 뚫고 부활의 빛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갑시다. 부활하신 주님을 맞이하러 기쁨으로 달려가면서 우리 또한 부활하는 이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너희는 나와 나의 말을 기억하라!>는 주님의 사랑의 말씀을 어떻게 기억하고 사느냐에 따라 그 기쁨과 환희의 강도는 다를 것입니다. 관습적이고 타성적인 정신은 참된 부활의 신비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샤르를 베기는 <심술궂은 정신 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형식적이고 관습적인 참여는 죽음에서 부활에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을 잊지 못하고 사랑으로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 참여하려 할 때 ‘익숙하고 당연한 것’에서 ‘낯설고 특별한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몇몇 여인들이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주님이 묻히신 무덤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무덤으로 달려감은 일상의 익숙한 생활 행위가 아닌 새롭고 특별한 행위이며, 이는 그녀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죽으신 주님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표지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들의 마음의 변화 보다 무덤은 더 빨리 변해있었습니다. 무덤에 도착한 그녀들은 깜작 놀랐습니다. 돌문을 어떻게 열 것인가를 기도하며 달려갔었는데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이 굴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 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일로 그녀들은 당황하고 놀랍기만 했었겠죠. 그 까닭은 시신이 없어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이는 곧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인 부활>을 수용하기 위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녀들 앞에 두 명의 천사가 나타나서 들려 준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Lk24,7)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는 언급을 듣고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 낸 것이죠. 여성의 가장 큰 능력 중의 하나는 탁월한 기억력이라고 저는 경험했습니다. 그 때서야 그녀들은 사도들에게 달려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농담으로, 헛소리로 듣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베드로만은 벌떡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아마포만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간단하게 묘사합니다. 이는 베드로 역시도 아직은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녀들도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수용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부활의 신비가 실제로 자신의 삶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열심과 열정은 있었고 ‘하느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그들 스스로의 힘만으로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결국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하느님의 신비, 신앙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만이 들은 것을 기억하게 만들어 주며 일어난 일을 보고 깨닫게 합니다.  

 

다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부활의 신비를 선포한 첫 증거자들이 여성이었다는 사실과 그녀들의 선포를 듣고도 ‘믿지 못하고 헛소리처럼 여기고 이상한 일로 받아들인’ 사도들의 태도가 제겐 엄청난 무게로 다가옵니다. 세상도 그렇고 교회 안에도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고 차별받는 부류가 있지만, 이 복음 대목에서는 그 대상이 바로 여성들이라는 점입니다. 여인들의 선포를 <헛소리처럼 여겼다.>는 표현은 당대에도 그렇고 지금도 교회 안의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새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사도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진리 편에 서야 하고,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막상 진리 앞에 서 남성적이고 신분적인 권위를 내세웠음을 기록한 복음사가의 뜻을 헤아려 보게 합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지금도 사도들처럼 권위주의적인 태도와 시선을 갖고 있는 분들이 없지 않다는 점입니다. 훗날 사도들이 참으로 부활의 참된 증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역시도 자신들을 가로막았던 돌무덤의 돌이 치워졌기 때문입니다. 성과 신분 그리고 남녀노소라는 차이를 가로막고 있는 돌을 치울 때 진정한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로마서의 말씀대로 교회 안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와 평신도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하느님의 자녀들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느님을 위하여 사신 것처럼 우리 역시도 이제는 우리를 위해 살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닮아 어제의 낡은 생각과 시선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마음과 시선으로 살아가는 게 진정한 부활의 체험자이며 선포자가 되는 길이라 확신합니다.

<오늘 밤 어제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오늘의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되살아났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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