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일

by 언제나 posted May 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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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Jn13,37)고 호언장담하면서 끝까지 주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결국 3번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배신한 자신에 대한 실망과 환멸 가운데, 베드로는 새로운 출발, 재출발을 위해 결국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익숙한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처음 가졌던 마음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다른 동료들도 참담한 심정으로 함께 떠나온 고향으로 그리고 예전의 일터인 티베리아스로 가서 고기잡이로 심란하고 답답한 마음을 추스르며, 마치 세월을 낚는 마음으로 고기 잡으러 다시 나갑니다. 배를 타고 나가 밤새 그물질을 해댔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합니다. 세월이 야속한 건지 자신들의 그물질이 서툴렀는지 아니면 고기를 잡을 의지가 부족했는지 그들은 실망스럽고 허탈한 아침을 맞게 된 그 때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허나 그들은 아직도 자기 실망과 환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아무도 처음엔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지 못했지만,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Jn21,6)라는 말씀을 듣고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때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확신한 요한이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21,7)는 언질을 하자, 베드로는 <호수에 뛰어들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때, 베드로는 호수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자,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을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Mt14,28)라고 간청해서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다 거센 바람을 맞고서는 물에 빠지자 두려워서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호들갑을 떤 적이 있었잖아요. 그런 겁쟁이 베드로 사도가 모든 것을 잊고 바다로 뛰어든 것입니다.

 이는 곧 세례의 바다, 새 생명의 바다, 사랑의 바다로 뛰어든 것입니다. 무모하리만큼 어리석고 단순함이 베드로의 본 마음이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실패에 집중하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면서 오로지 다시 찾아주신 주님께 대한 믿음의 의탁에서 이렇게 바다에 뛰어 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체험입니다. 무작정 죽음으로 뛰어듦이 아니라 생명에로 뛰어듦이며, 이 뛰어듦을 통해 어제의 베드로는 죽고 오늘의 새로운 베드로로 다시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도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생명과 은총의 바다에 뛰어듦을 통해 물과 성령으로 다시 거듭나야 합니다. 이처럼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그 순간이 바로 부활의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와서 아침을 들어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부활에로 초대합니다. 오늘이 바로 우리에게는 새 아침이며, 주님과 함께 부활의 식사를 하는 기쁜 날입니다.  

숯불 곁에서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와, 이제 숯불 곁에서 다른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숯불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우리 또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거나 배신했던 때를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허나 그 숯불은 우리의 부인과 배신을 탓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의 배신과 부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기억하기 위한 상징입니다. 그 숯불은 우리의 비참함의 상징이지만 또한 주님의 자비로움의 상징입니다. 숯불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숯불 곁에서 예전과 동일하게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21,13.14> 이로써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을 복음은 강조합니다. 이는 제자들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그 자리가 바로 숯불 곁이었습니다. 이 숯불은 용서와 자비, 사랑과 평화를 상징하는 성령의 불이며 성령의 힘입니다.

 

그 숯불 곁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21,15.16.17)라고 3번이나 묻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서 <더 사랑합니까?>라고 베드로에게 직접적으로 주님께서 물으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물론 이 질문은 단지 베드로에게만 하는 질문이 아니며, 이 질문은 모든 복음 선포자들이 자신의 가슴에 새겨야 하는 질문이며, 가슴을 파고드는 물음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물음은 모든 각 제자들에게 향한 질문인 것이며, 결국 베드로의 대답은 복음 선포자로 불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 드려야 할 대답이기도 합니다. 복음 선포자로 불림 받은 사람들 각자가 주님을 향해 갖고 있는 개인적인 사랑에 대한 물음입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 즉 교회의 받침돌이 된 것은 그의 출신 가정의 우월함, 지적 능력의 탁월함, 고매한 성격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Mt26,33)라고 장담했지만 그 역시도 걸러 넘어졌기에, 베드로는 이제 주님의 질문 앞에 단지 조용히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21,17)고 밖에 달리 대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이 대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대답 중에서 가장 성숙하고 진솔한 대답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 대답은 베드로 사도가 이젠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겸손한 마음에서부터 솟아 나온 답변이며, 이로써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와 열정이 아닌 모든 것을 감싸는 주님의 사랑에 온전히 의탁하며 예수님의 손에 내어 맡기게 됩니다. 이 때의 베드로의 겸손한 대답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어 주려할 때 <주님, 제 발은 절대로 못 씻으십니다.>라고 소리치던 때의 격정어린 과신이 아닙니다. 그는 이 순간 <저는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사랑합니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오직 주님의 힘에 의지하여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행해서 <내 앙들을 돌보아라.>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목자직을 수여하며 그를 인정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만나서 대화하신 것은 주님의 부활 이후의 일이며, 부활의 빛이 있는 동안 베드로는 <착한 목자이신 스승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돌보고 보살피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양들을 위해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21,18)라고 베드로 역시도 당신과 같은 운명과 동일한 운명의 길을 가게 되리라고 알려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그 숯불 곁에 서 있었던 부활의 새 아침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우리 마음 창에 걸어 둡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