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간 목요일

by 언제나 posted May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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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은 항상 일정하고 규칙적입니다. 허나 사랑할 때나 고통 중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그 상태에 따라서 평소와 다르게 느낄 것입니다. 사랑할 때는 시간이 흐름이 빠르게 느껴지지만, 고통 중에는 그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간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조금 있으면>(Jn16,16.17.18.19)이라는 표현을 무려 7번이나 사용합니다. 주님의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조금 있으면>과 제자들이 느끼는 <조금 있으면>의 시간에 대한 느낌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전혀 다르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떠나가실 예수님과 기다리는 제자들의 입장 차이에 따라 시간의 흐름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으리라 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조금 있으면>이란 의미는 글자 그대로 짧은 순간일지 모르지만(=죽으셨다 사흘만에 부활),하지만 주님을 떠나보내고 남아 있을 제자들에겐 <부활>이란 상상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조금 있으면>은 정말이지 길고도 아주 긴 시간이었으리라 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제자들의 슬픔과 절망의 깊이는 비례했으리라 봅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 신앙을 전제로 한 믿음이요 신앙이기에 제자들과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Jn16,16)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더 이상 인간의 육안으로 그분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분을 예전처럼 육안으로 볼 수 없고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은 오직 믿음의 눈,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보지 못함과 다시 봄>의 대조는 곧 <떠남과 다시 오심>, <부재와 현존>을 내포하고 있고 이런 대조는 곧 삶의 양면성과 이중성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비움이 곧 채움이며, 떠남이 다시 만남이며, 죽는 게 사는 것이라는 저 삶의 파라독스!!!! 이러한 모순성을 알아듣고 제대로 보기 위해서, 이 양극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파스카 여정이 단지 그분만의 여정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와 유사한 내적 태도와 인식의 전환을 위한 건너감이 요구됩니다. 단지 외적인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서 우리의 인식전환을 위한 <영적 죽음과 비움>을 체험(=통과)할 때 비로소 그 시간이 왜 그분에게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인지를 알게 되리라 봅니다. 이 체험!!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충분히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자신들의 의문을 주님께 직접 묻기보다 동료들과 함께 자신들의 문제를 공유하며 나눕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반응할 때가 많습니다. 당혹감을 함께 공유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안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근심과 불안을 직시하거나 직면하지 못할 때 몰이해는 더 깊은 어둠으로 절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인생살이에서 꼭 해답을 찾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마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도 좋지만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또한 우리네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입니다. 해답을 찾지 못해도 우리 앞에 놓여 진 문제를 직시하고 직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버려짐, 남겨짐>의 시간이 참으로 유익하고 성숙할 수 있는 가장 의미로운 시간으로 닥아 오리라 봅니다. 삶이 그러하듯 우리의 신앙 여정은 <오름과 내림>,<충만과 비움>,<낮아짐과 들어 올려짐>,<죽음과 부활>,<부재와 현존의 순간>이 교차해서 닥아 옵니다. 신앙생활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나 시간 속에서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에 신뢰하면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그 부재의 순간이 가장 강력한 현존의 순간일 수 있고, 죽음의 순간이 곧 부활을 위한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그런 내적 태도를 형성하도록 도와줍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16,20)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제자들이 애통해하고 슬퍼함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슬퍼함은 슬퍼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퍼한 만큼 그 기쁨 또한 충만할 것입니다. 주님은 남겨질 제자들이 애통해 하고 슬퍼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허나 떠나지 않으면 다시 올 수 없고,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기에 떠나야만 했습니다. <사랑하기에 떠납니다.>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제자들과 달리 세상은 기뻐할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된다.>는 표현처럼 제자들과 달리 당대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위협적인 존재요 적대자였던 주님의 죽음을 통해 잃었던 백성들의 지지와 지배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얼마나 좋아하고 기뻐했겠습니까? 허나 세상 이치가 한 쪽이 밝으면 한쪽은 어둡기 마련이고, 한 쪽이 웃으면 한 쪽은 울게 되어있습니다.

진리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 정의와 자비가 숨 쉬는 세상을 고대하던 제자들에겐 주님의 죽음을 통한 어둠과 죽음의 문화가 팽배할 세상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벅차고 애통했으리라 봅니다. 다시 어둠과 죽은 문화가 판치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들의 절망과 슬픔의 느낌이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세상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으니, 부활이라는 새로운 현실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으니, 부활은 멋진 반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게 바뀌는 역전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미가 드러난 예언의 성취요 실현이 될 것입니다. 슬퍼하라 그러면 기뻐할 것이다. 기다려라 그러면 다시 볼 것이다. 오늘 예상하지 않은 슬픔이나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부디 슬픔 가운데서 기뻐하시고 기쁨이 오리라는 기다림으로 살아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