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승천대축일

by 언제나 posted Jun 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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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승천 대축일을 축하합니다.

오늘 승천에 관한 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은 많은 유사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루가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LK24,50~51)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사도행전 또한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애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1,9) 복음과 사도행전의 승천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슈퍼맨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들리지만 승천의 본뜻은 육체를 지닌 인간 예수님이 영적 존재인 하느님의 위치로 복귀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리라 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불완전한 인간의 위치로 내려오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강생의 목적이 이루어졌기에 본래의 자리, 제자리로 돌아가신 것이 바로 승천의 의미인 것입니다.

 

전례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昇天)을 분리해서 기념하고 기억하지만 실은 부활과 승천은 하나의 신비입니다. 사실 구약에는 이미 승천하신 분들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에녹의 승천에 관해서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 가신 것이다.(창5,24)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느님과 살다가 때가 되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네 정서와도 비슷하고 승천은 곧 하느님 계신 곳으로 歸天이며, 떠나 온 고향으로 돌아가는 歸鄕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서 승천이 바로 부활과 다른 신비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승천은 오늘 화답송의 후렴처럼 <환호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시47,9)는 노래에서 죽음을 승리하신 예수님이 천사와 대천사들의 환영을 받으며 하느님의 영광 가운데 하느님의 오른 편에 좌정하심을 축하하는 기쁨과 환희를 연상하게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당신 홀로 하늘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뒤따라 올라 갈 우리가 머물 거처를 마련하러 하늘에 오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바로 우리 미래의 희망이며, 미래에 올라가야 하는 하늘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기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나라에,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본기도)라고 우리의 바램을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원죄로 말미암아 굳게 닫혔던 하늘 문이 예수님의 승천으로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이미 하늘은 열렸지만 아직 우리에겐 열리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1,1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 자리를 마련하신 다음 다시 우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기에,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그 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님께서 남긴 유언을 기억하고 삶을 통해 증언하고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선,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8,20)는 약속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 끝날 때 까지 예수님은 교회 곧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디서나 어느 때든지 늘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새로운 존재 방식인 영적 현존을 깨어 의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열린 눈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은 순간은 어느 순간도 없습니다. 떠나셨지만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예루살렘에서주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LK24,47)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바로 구원의 출발점이며 도착점인 바로 우리네 삶의 자리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자리에서부터, 아니 내 자신부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파스카 삶의 생명력이며 역동성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전제되고 자신의 구원을 체험한 사람만이 참된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시고,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14,51) 주님의 강복이 없이는 우리 힘이나 능력만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증인의 일을 우리게 맡기시면서 우리의 능력만으로 불가능하기에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24,29)고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을 보내 주셨기에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복음의 증인으로서 역할을 담대하게 굳건하게 수행 할 수 있었고 오늘 제2독서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계시와 지혜의 영을 주시어, 하느님을 알게 되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질지를 그분의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1,17.18.19)

 

이러한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체험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찬미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지냈다.>(24,53)고 하는 표현에서 우리가 지니고 살아야 할 삶의 본보기를 찾게 됩니다. 사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그 자리엔 분명 주님께서 함께 하셨을 것이고, 함께 기도하면서 제자들은 서로 끈끈하게 주님의 현존으로 결합되고 연결되어 감을 피부로 체험하면서 더욱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점차 확대되어 가고 지속되어 갔을 것으로 짐착해 봅니다.

 

이제 당신이 떠나셨던 자리로 되돌아가신 예수님, 우리는 더 이상 인간적인 눈으로 그분을 볼 수 없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믿음의 눈과 영의 눈으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현존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아버지 집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신 그 분께서는 떠나실 때의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 그 날까지 받은 사랑과 주신 약속을 믿고 더욱 성숙한 아들딸로 살아가야 하리라 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이제 우리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 자리에 맞갖은 존재로 살아가는게 승천을 살아가는 존재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승천대축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