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Memoria Passionis(고난의 기억)

by 후박나무 posted Jun 1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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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대축일인 오늘까지도 스코틀랜드 어느 양로원에서 여생을 지내시는 할머니가 쓰셨다는 시가 여운을 남긴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못지않은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말년이 저녁노을처럼 서녁하늘을 곱게 물들이다 스러지기를 바라지만 그건 우리의 소관은 아니다. 물론 바라는 것은 자유지만!

 

이제껏 내가 본 일몰 중 가장 아름답고 장엄했던 일몰은 85년 10월 3일 개천절을 포함한 연휴때 홀로 지리산을 종주하고 장터목에서 노고단으로 지는 해였다. 해가지면 영하 3~4 도 까지 떨어지는 쌀쌀한 날씨도 일몰 감상에 한 몫을 했다. 일출보다 일몰을 더 아름답게 느끼는 사람은 서녘하늘도 곱지만 반대쪽 하늘에 나타나는 남색을 잊지 못할 것이다.

 

해질녘 하늘색

내가 떠날 때도 그럴까

 

는 그때 본 지리산 일몰을 생각하며 쓴 것이다.

 

말년이 꽃보다 고운 단풍이 되기 위해 필요충분조건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분명히 온전한 기억일 것이다. 20대 초반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으며 페이지마다 우러나오는 진실함에 커다란 위로를 받은 적이 있었다. 동시에 나는 아마도 말년이 되어서도 자서전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도 가졌었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용기도 원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살아오면서 우리가 했던 체험들, 대개 남에게 말하기 어렵거나 감추고 싶어 사장된 기억들을 생각나게 하여 온전케 한다.

영어의 Whole, Health, Holy 의 어원이 같음은 시사 하는바가 많다. 수도회의 모토인 Memoria Passionis(고난의 기억) 은 개인의 역사라는 차원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