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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종의 넷째노래

by 후박나무 posted Jul 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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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예언자 혹은 대예언자로 불리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등은 단독으로 활약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학파와 같이 스승을 따르는 도제와 같은 일군의 무리들이 있어 스승의 말이나 글을 모아 연구도 하고 편집하여 후세에 전했다고 한다. 이사야서는 다른 예언서와는 달리 1사람의 이사야가 쓴 글을 집대성한 것이 아니다. 이사야서가 언급하는 역사는 한 사람의 생애에 일어날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는 적어도 3사람의 시인이 쓴 글을 모은 것이라 본다.

 

그 세 사람의 시인을 편의상 제 1, 제 2, 제 3 이사야라고 부르는데, 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삶의 오의와 신비를 가장 뛰어나게 밝힌 분은 수난 받는 야훼의 종을 계시한 제 2 이사야가 아닐까 한다.

 

수난 받는 야훼의 종의 넷째노래는 그야말로 고난의 신비를, 십자가 신학을 바빌로니아 유배시절에 벌써 밝힌 것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도 저물어가는 당신자신의 삶을 마주보며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이런 이해를 드러내신다. 복음사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공동번역이 묘사하는 야훼의 종이 보다 실감나기에 여기서는 공동번역을 인용한다.

 

 

 

이사야 52:13

"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 하였으니, 높이높이 솟아오르리라.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만방은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리라. 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본 사람도 없다."

 

이사야 53장: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 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하리라.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었기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여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제일 커다란 소망은 예수를 따라 순교하는 것이었다. 순교나 십자가 신학은 이사야가 밝힌 야훼의 넷째 종의 노래, 즉 대속적인 죽음이라는 배경과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 수도회의 모토인 “고난의 신비가 우리가운데” 도 이 관점을 고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