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일

by 언제나 posted Aug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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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보면,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Lk13,23)라고 어떤 사람이 묻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13,24)라고 대답 하십니다. 그런데 “좁은 문”이란 말마디가 마음을 짓누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는 것마저도 무한 경쟁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치솟아 오르기 때문입니다. 예전 <공부의 신>이라는 TV드라마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내용은 별 볼일 없는 꼴찌들을 모아 국내 최고 명문대에 합격시키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였다고 합니다. 시청자들은 <Loser 루저: 패자>들의 변화과정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이 드라마에도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강자의 논리’와 ‘1등 지상주의’가 깔려 있는 모순이 담겨져 있었다고 봅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어느 개그맨의 풍자처럼 세상은 늘 첫째를 우선적 가치로 꼽습니다. 둘째 이하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1등만 대접을 받는 게 가정에서도 세상에서도 같습니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우리는 남과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고 죽이는 일에 익숙해져 살아왔습니다.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안간힘을 써온 우리에게 ‘좁은 문’은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지긋지긋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도 ‘좁은 문’이라뇨?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신앙생활도 결국엔 나 하나의 구원을 위해 다른 이들을 물리쳐서 이겨내야 한다는 뜻일까요? 사랑의 예수님께서 설마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3,24) 저는 확신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의 의도는 구원받을 사람들 숫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해 말씀하시고 계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좁은 문은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회개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먼저 구원이란 인간의 의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 주면서, 그 의향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의향에 맞갖은 의지적인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한데 그 노력이 좁은 문, 즉 회개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의미는 다름 아닌 주님과의 형식적 관계가 아니라, 친밀한 내면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회개의 여정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부족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사랑이신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이고 자비이신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은 주님을 상징합니다.

 

다만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두드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의지와 필요성입니다. 구원은 오직 구원을 필요로 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문 밖에 서 있을 것입니다. 문 밖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문 밖의 세상이 주는 사라질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두드림은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두신 용서와 자비의 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넓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좁은 문을 제시하십니다. 아마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현재의 모습대로 들어가기에 좁다는 뜻일 것입니다. 본래면목을 회복한다면, 문은 들어가기에 결코 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삿짐 옮기듯 많은 것을 등에 지고, 손에 움켜쥐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비좁을 것입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겨 가져가고 싶어 하는 부귀명성들이 오히려 문에 걸려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이 삶의 주인공이라는 교만, 자신만이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자만, 그런 장애들을 버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이 바로 좁은 문일 것입니다. 혹시 원숭이 잡는 법을 아시나요. 호리병에 좋아하는 과일을 넣어두면 욕심 많게 손에 가득 잡게 되는데, 원숭이가 손에 쥔 것을 놓으면 살 수 있는데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기에 쉽게 원숭이를 잡을 수 있답니다.

 

그런데 그 문은 항상 우리를 기다리며 열려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문이 닫히는 때가 오면, 사람들은 문 밖에서 외칠 것입니다.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13,25) <문을 닫아 버린 뒤에는 두르려도 소용이 없다.>란 말씀은 구원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 즉,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세상의 일을 하고 내일은 구원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요, 모든 것을 위해서는 물론 서두를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어느 문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넓은 문입니까? 좁은 문입니까? 우리가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하는 까닭은 그 문이 생명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을 포기해야 하는 까닭은 그 문이 멸망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미루어서는 아니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넓은 문은 누구나 꿈꾸던 삶의 모습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넓은 길을 선택함과 동시에 넓은 예루살렘 성문을 당당하게 통과하길 원했습니다. 저 역시도 수도생활의 연륜이 늘어나면서 지원자나 수련자 때와 달리 이제 적당히 편안히 살고 싶고, 현재의 삶의 상태로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벌써 몇 개월째 계속되는 치료와 운동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걸을 수 없고, 서서 미사 드리기도 힘들 때가 많아서 자꾸만 그냥 가만히 쉬고 싶고, 움직이기도 싫을 때가 많습니다. 한의사의 한 마디, <고통을 받아들이십시요!> 그러기에 문제는 아픈데 아프다고 자꾸 게을러지면 이 보다 더 몸이 망가지겠죠. 몸은 늘 힘든 것보다 쉬운 것을 더 좋아하나 봅니다만 저 자신도 매번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부단히 몸을 움직입니다. 문제는 늘 어떤 마음을 가지냐가 관건이라고 봅니다. 넓고 편한 길과 문으로 들어가려 하는 제 마음을, 지금은 그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마음을 느긋하고 편하게 가지려합니다. 

 

신앙은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회개를 필요합니다. 좁은 문이신 예수님처럼 살아가려고 처절한 싸움입니다. 절대 방심은 금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평생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영광의 문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의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가파르고 좁고 험한 길인 십자가 길, 치욕과 죽음의 길인 십자가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평생 예수님 길은 좁은 문의 연속이었습니다. 좁은 문만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문, 생명에 이르는 문, 생명을 구하는 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있다면 항상 어려운 길을 선택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