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간 월요일

by 언제나 posted Sep 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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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공포증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과도하게 지나치게 의식하기에 파생된 병이지요. 이런 심각한 병은 아니더라도 우리들은 살면서 계속하여 다른 사람의 시선(視線)을 의식하여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감이 있으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겠지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에 매우 신경을 쓴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 지가 내 행동의 방향도우미가 되면 그 만큼 그 사람의 인생은 불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일을 지켜보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당신의 돌봄과 치유를 필요로 하는 오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Lk6,6~11)

 

당대의 관습과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친다.>는 것은 분명 법에 어긋나는 일이며 올바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발단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마침 회당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두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를 돕지는 못할망정 잠잠히 있으면 좋으련만,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시선이 오그라든 사람보다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시선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이미 그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아셨기에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동일한 사람, 곧 도움을 필요로 하는 오그라든 사람을 향한 시선이 전혀 달랐던 까닭은 그 사람에 대한 전혀 다른 시선과 접근방식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언제나 단지 자신의 시선만이 아니라 ‘자신이 손수 지은 사람에 대해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시는 아빠 하느님의 마음으로 그 오그라든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선은 안식일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움을 필요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얄팍하고  편협한 시선에서 예수님의 행동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제와 달린 변화된 지금도 민간인을 사찰하고 있는 국정원 직원들의 감시의 시선으로 예수님을 그들은 감시하고 사찰한 것입니다. 그 때도 지금도 사람이 우선하는 세상이 아니라 법이 우선하는 세상입니다.

 

허나 예수님은 그들의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6,8)고 그를 이끄셨습니다. 마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하고 예수님께서 묻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Mt18,1.5)고 말씀하신 장면이 오버랩 되어 다가옵니다. 이런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을 보내신 아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깊은 마음은 바로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6,9)라고 묻고 질책하심에서 잘 드러납니다. 오그라든 그 사람 또한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 곧 예수님께서 하신일이기에 예수님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오그라든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선택하시고 실행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오그라든 손을 가진 그 사람은 그로인해 행동이 불편했겠지만 마음은 오그라들지 않았지만, 손이 오그라들지 않은 그들은 마음이 이미 오그라든 사람들이며 이는  예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골이 잔뜩 난>(6,11)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손이 오그라들었던 그 사람은 <손을 뻗어라.>(6,10)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손이 다시 성하여졌지만, 반대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마음은 더 오그라들고 더 굳어졌겠지요. 어느 쪽이 더 인생을 아름답게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행복하게 살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