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간 수요일

by 언제나 posted Sep 1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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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난하며, 가난하게 살고 싶은가?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너나 나나 다들 힘들고 가난했기에 가난을 당연시 받아들이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그닥 어렵고 힘들지마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은 지금에 있어서 가난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참으로 막막하고 슬픈 일입니다. 40대 여성 탈북자 한모 씨와 6살 아들이 서울 봉천동 한 임대아파트에서 숨진 지 두 달여 만에 발견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냉장고가 비어있었고 임대아파트 월세와 공과금이 1년 가까이 밀린 걸 보면 굶주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소식이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생사를 넘어 자유를 찾아 탈북해 왔는데, 자유를 찾은 이 땅에서 굶주려 죽었다니 얼마나 참담한 소식입니까? 어쩌면 가난이란 이 母子처럼 누구에게 그리고 그 무엇에도 기대할 것이 없는 상태가 바로 가난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외롭고 속상한 것이 가난입니다. 물론 제 주변에도 아직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위와 같은 상황이라면 가난이 아니라 궁핍한 상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그들에게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우리 중 누가 그들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오늘 복음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먼저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고 있고, 사람들로부터 미움받고, 쫒기고 모욕하고 중상당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포하셨고, 그 반대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셨습니다.(Lk6,20~26) 그렇다고 예수께서 가난함, 굶주림, 울음, 미움-추방-모욕-중상을 두고 행복하다고 선언한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생존하는데 없어져야 할 <부정적인 것>, 즉 악의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께서 부유함, 배부름, 웃음, 칭찬 그 자체를 불행한 것으로 선포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런 상태는 오히려 증가되고 전염되어야 하는 <긍정적인 것>, 즉 선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왜 부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행복한 자로, 긍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불행한 자로 선언하신 걸까요? 그것은 각각의 상태가 가지는 수용능력 때문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의도는 <가난과 부요>가 <행복과 불행>을 구별 짓는 기준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입니다. 결국 가난함과 부유함 중에서 어느 상태가 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잘 수용할 수 있으며 그 가치를 담을 그릇이 넓으냐는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처럼 <가난함의 그릇>에 하느님 나라를 담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며 만족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차지했다고 믿기에 누구보다 더 부요하고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어떤 사람은 <부유함의 그릇>에 하느님이 아닌 세상적인 것들로 채우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재물에 대한 탐욕만을 담으려고 하기에 불행합니다. 탐욕은 불행의 올무이자 족쇄이며 늪입니다. <부유함의 그릇>에 탐욕만이 가득하다보면 탐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시잖아요. 가난한 사람도 부자들처럼 탐욕의 늪에 빠지면 하느님도 이웃도 보이지 않고 불행해 집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1콜3,1)라고 권고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삶과 새 인간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들답게 산다는 것은 <현세적인 것들 특히 탐욕을 죽이고, 수치스런 말 따위는 버리는>(3,5.8.9)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점은, 성서학자들은 성서를 연구하면서 깨닫게 된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은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더 사랑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늘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 대해 우선적인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왔습니다. 이런 삶을 살고자 하는 수도자나 성직자가 때론 좌파(?)처럼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바람직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의식이나 삶 안에서 부유함에 젖어 사는 것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지향 자체가 바로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의 모습니다. 수 백억원이 넘는  큰 저택에 사셨던 독일의 고위 성직자를 파면하신 교황님의 의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솔직히 가난하지도 부자도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요?’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부유하기에 마냥 행복하고 가난하기에 마냥 불행한 것이 아님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음 인용문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칸트는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러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라고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교의 신비가인 에크하르트는 <하느님께 도달하는 과정은 영혼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묻은 그 무엇을 털어내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