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화요일

by 언제나 posted Sep 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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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과 지금의 상황이 반전되었지만, <과부가 찬밥에 곯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남편이 죽고 혼자 몸이라고 해서 몸을 소홀히 하여 허약해지는 과부의 곤궁한 처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제 주변에도 이제 나이드시어 혼자되신 분들이 많습니다만,  때론 그분들의 어려움을 제가 알지 못했기에 위로해 드리지 못한 아쉬움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들과 함께 나인이라는 고을의 성문 어귀에서 죽은 외아들의 영구 행렬과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외아들의 어머니인 과부와 만나는 장면입니다.(LK7,11~17) 남편을 잃고 홀로 외아들과 함께 살아 온 나인의 그녀에게 외아들은 살아야 할 존재 이유이자, 삶의 위로이며 희망이고, 지지요 바람막이와 같은 존재인데 그 외아들마저 잃게 되었으니 그녀는 이중의 가난함 곧 최악의 상실의 상태에 놓인 불쌍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 과부가 느꼈을 슬픔과 고통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절망과 최악의 상황이었으리라 봅니다. 슬픔에 슬픔, 절망에 절망의 상태에서 그녀는 장례 행렬 도중 예수님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외아들의 죽음으로 그녀의 삶은 모든 것이 다 끝난 상태와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울음소리는 울부짖음이었으며, 그 울부짖는 소리가 얼마나 컸고 슬펐던지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외아들과 함께 살아왔는지를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 팠을 것입니다. 그녀의 울부짖는 통곡소리에 마음으로 그리고 몸으로 함께 하려는 심정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들 나와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운구 행렬을 뒤따르고 있었다고 복음은 이 장면을 세세하게 그려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의 개인적 상상이지만, 그 과부의 모습에서 예수님은 미래 자신의 죽음을 겪고 애통해 하실 어머니 마리아를 연상하셨을까요? 연상했든 연상하지 않았든 예수님은 그녀의 사연을 듣고 나서는 과부의 절망적인 슬픔과 고통을 외면한 채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슬픔과 고통을 공감하고 동감한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어찌할 지 줄 모르는 채 몸이 먼저 움직여 나갔다는 사실입니다.(7,14) 흔히 우리는 성서에서의 사랑을 말할 때, 그 사랑은 전인격적 차원에서 드러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움직임은 특히 마음(=공감), 입(=말로 표출) 그리고 행동(=손)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3차원에서 예수님의 마음의 움직임과 말씀과 행동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도 큰 슬픔에 잠겨있는 과부의 얼굴과 마음을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녀에게 다가가십니다. 사랑은 이처럼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공감하면서 가엾이 여기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골고타로 향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동안 뛰 따라 오면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인들을 향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23,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자식 잃고 눈물로 휑한 그녀의 슬픈 얼굴과 애통해 하는 마음을 헤아리시고 다가가시어 마음에서부터 치솟는 가엾은 마음에서 <울지 마라.>(7,14)하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십니다. <울지 마라.>는 단지 눈물을 흘리지 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울어야 하는 사람은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울지 마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자비하신 아빠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지금 당신에게 아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이 여인에게 기쁨을, 희망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셨기에 밑도 끝도 없이 들릴지 모르는 <울지 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씀 <울지 마라!!!>는 단지 그녀에게만이 아니라 지금도 자식 잃고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을 많은 부모들에게 들려주는 듯 다가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시어 <관에 손>을 대십니다.(7,14) 관에 손을 대어 운구 행렬을 멈추게 하신 것은 더 이상 그 젊은이가 죽음의 깊은 골짜기로 다가서는 것을 막는 것이며, 당신의 구원의 말씀을 하기 위한 준비 동작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죽음과 같은 어둠과 절망에로 다가서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 어깨에 손을 얹고 더 이상 나가지 못하도록 멈추게 하실 것입니다. 멈추어 선 것은 관이 아니라 죽음의 문턱에 멈추어 선 그 젊은이였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에 묻혔던 라자로를 향해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Jn11,43)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동일한 어감으로 <젊은이여,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7,14) 이로써 예수님은 그 젊은이를 잠(=죽음)에서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 찬 산자의 세계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이로써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과부에게 <울지 마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그녀와 모든 동네 사람들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세상의 어떤 물질이 아닌 바로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하고 귀한 아들이 되살아나는 것이었고, 그녀의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참으로 구원을 체험하고 함께하시는 아빠 하느님의 자비를 그녀와 그 구원의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고 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왜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당신을 절실히 필요하고, 그 필요를 채워달라고 간절히 울부짖기 때문이십니다. 이집트의 종살이 가운데서 매일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서 구원에로 이끄셨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우리의 고통, 상처, 실패, 과오와 치부를 깨달으면서 그 상실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눈물 흘리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다시금 재확인하였듯이, 과부의 애절한 울부짖음을 예수님께서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다가가시고,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셔서, 그녀를 향해 <울지 마라!>고 다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이여, 일어나라!>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신 것뿐만 아니라 그 과부 역시 생명과 사랑의 충만함의 상태에로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단지 그녀와 아들만이 아니라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를 생명과 사랑의 충만함에로 초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오늘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어나는 하루가 되시기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