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간 토요일

by 언제나 posted Sep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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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다가오는 구절은 바로 <귀담아들어라.>(Lk9,44)는 표현입니다. 사실 요즘 <공감적 경청>이라는 말이 근래에 많은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공감적 경청은 상대방의 관점과 입장에서 듣는 것이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명량>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참된 리더쉽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 이순신 장군도 경청을 소홀히 하지 않았잖아요. 요즘 와서 경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경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잠시 공감적 경청에 대하여 이정훈의 <소통의 기술>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자는 공감적 경청의 수준과 단계를 5등급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1) 5등급: 상대방을 무시한다. 전달 내용이 하나도 없다. 2) 4등급: 듣는 척한다. 자신의 생각 속에 빠지고 집중하지 않음으로 계속 불편해진다. 3) 3등급: 선택적으로 듣는다. 즉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내용이 나중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4) 2등급: 귀 기울여 듣는다. 내용에 집중해서 듣는다. 5) 1등급: 공감해서 경청한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경청의 단계에서 가장 높은 단계는 바로 공감적 경청인 것입니다. 공감적 경청은 한 마디로 <상대방에게 집중하여 귀 기울여 들음으로서 상대방의 생각과 느낌 즉 감정까지 깊이 공감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울러 <이청득심以廳得心>이라는 고사 성어가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 들음으로써 마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 가운데 듣기가 얼마나 중요한 가는 바로 <귀>는 둘이지만, 말하는 <입>은 하나로 이는 곧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듣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데 우리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말을 배우는 데는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2년 정도 걸리나 제대로 듣는 것을 배우는 데는 60년도 더 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이유는 듣는 사람의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듣고 상대방을 판단하려 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은연중에 자신의 생각대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조종하려는 태도 때문에 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감적 경청>이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늘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능력(?),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늘 자기중심적으로, 자기편한대로 듣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의 수난이 일어나고 오해와 갈등이 생길 수 있는 지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말씀하시지 않고 특별히 자기들에게만 따로 말씀하셨음에도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그러기에 <이해하지 못하였다.>(9,45)는 표현은 성서에 무려 17번이나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저희와 달리(?) 이해력이 부족했을까요. 물론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9,45)는 말을 통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듣고 거의 맨붕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듣고도 듣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이 없었으며, <공감적 경청> 능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천국은 무한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제자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처지와 심정을 들어주고 마음을 깊이 헤아려 주려는 마음이 부족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들의 영혼 상태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과도 같은 어둠과 절망을 느낄 만큼 혼란 그 자체였다고 보여 집니다.

 

들음을 잃어버린 세상, 들어야 할 내면의 소리는 물론 타인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자연의 소리마저 잃어버린 것이 현대인입니다. 정말 들어야 할 소리보다는 하루 종일 지나치게 오래 동안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살다보니 청각에 관계된 질병이 증가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이러니 침묵이 사라졌고, 침묵을 잃어버렸기에 생각함도 잃어버린 세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담아들어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단지 청각적으로 <들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주님의 목소리를 침묵 가운에서 잘 듣고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향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침묵 가운데 주님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것>이며, 이 공감적 경청이 회복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께서 가실 수난의 여정을 동행하고 동반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