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일

by 언제나 posted Sep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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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나에게 혹시 어떤 불행이 닥친다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고 고민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걱정과 고민 때문에 밤을 지새우고 몸과 마음이 아픈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고 나면 이런 걱정들이 대부분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고 피식 웃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연한 걱정,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을 핀잔할 때 우리는 '기우' 라는 말을 씁니다. 기우란 말은 중국 고전인 '열자'의 '천서' 편에 나오는 기인지우(杞人之憂)의 줄임말로 기(杞)나라 사람이 쓸데없는 걱정(憂)을 한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에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그래서 "걱정도 팔자"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6,1)이라고 질책하십니다. 그런데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왜 불행합니까? 그 이유인즉, 자신을 위해서는 걱정하지 말아야 하지만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서는 걱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혼자만 호의호식하며 지내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이겠습니다. 살면서 느끼지만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문제란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모스가 불행하다고 경고한 것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외면한 채 내 배만 부르고 내 등만 따뜻하면 다른 사람이 굶주리건 말건, 병들어 죽든 말든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닌 누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요, 자기 아닌 누구에 대한 아무런 염원도 없고 그래서 염려도 없는 것입니다. 이는 곧 사랑 없음은 물론 미움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모스는 부유한 자들이 걱정과 염려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라고 질책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는 아모스 예언자의 구체적인 현실이며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사랑의 시작은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하더군요. 얼굴을 마주하고 누군가를 바라볼 때, 즉 나의 모든 방향이 그 사람을 향해 있을 때 그 누구든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보지 않는 무관심으론 누군가를 사랑으로 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았다.>(Lk16,22)라는 표현을 단지 일차원적인 <상선벌악>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승에 갔다가 다시 돌아 온 사람이 없기에 어떤 면에서 죽음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이 비유를 통해서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는 게 참된 인생인가를 물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자의 때 늦은 후회는 바로 삶을 살면서 시선이 주변 보다 자신에 집중하다보니 무관심과 무감각 곧 삶의 고뇌하는 주체보다 제3자적인 방관자의 시선과 삶의 태도에서 파생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부(富)란 그 자체가 선이 아니듯, 역시 악도 아니기에 부 자체가 그 부자의 불행의 원인일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아모스가 질책한 것처럼 그 부자는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살았던 사람>이었으며,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사람>(아6,1.6)이었기 때문에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 왔으며, 그 흥청거림이 끝난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에게는 타인에 대한 철저함 <무관심과 무감각>으로 대표되는 <구경꾼적인 어떤 삶의 태도>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라자로라는 거지가 자기 집 대문 앞에 있었던 것도 그의 관용 때문이 아니라, 거지의 존재 자체를 신경이나 관심조차 두지 않은 극단적인 무관심과 무감각에서 나온 행동이요, 또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도 애덕의 산물이 아니라 남은 음식에 대한 무관심의 산물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 개들이 종기를 핥는다는 표현도 결국은 부자의 무감각을 드러내고, 어쩌면 이러한 삶이 물질적 부를 가능하게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을 이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부자의 무관심이 그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부자의 모습은 옛날의 어떤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남이야 어떤 처지에 살고 있든 자신만 잘 살고 마음 편하면 된다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부자와 같은 삶의 태도를 당연시 받아들이고 있음이며 이런 의식이 점차적으로 사회 전반에 팽배해 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타인의 프라이버스를 존중해 준다고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현상에서 때론 <주위의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이러한 <관심에서 출발하는 사랑이라는 회개의 삶>이 바로 부자와 거지 나자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들어 알고 있지 않나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무관심은 악한 태도이며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았다.>(Mt25,42)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을 환기시켜 줍니다. 결국 우리의 무관심이 바로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라자로를 바라봅시다. 무관심으로 닫혀 있는 구경꾼의 시선이 아니라 바라봄으로써 품을 수 있는 사랑을, 주변의 라자로와 같이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주님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시146,7)

 

* 오늘 주일과 겹쳐서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을 전례적으로 지내지는 못하지만 축일은 축일이기에 축일 맞는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축일 지내시고요.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