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by 언제나 posted Oct 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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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6일 광주 일곡동 <개방의 날> 강론에서 저는 제 사랑의 한계를 개방의 날 참가자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 온 지 벌써 50년 동안, 그러나 요즘 와서 저는 그렇게 살지 못한 저 자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일본 아베야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이 땅을 함께 살아가는 몇몇 친일종파자들, 특히 이영훈과 그 무리며 주옥순과 같은 사람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그런 그들에게 욕설과 함께 분노가 솟구칩니다. 어렸을 때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먹기 싫어도 먹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먹기 싫은 것은 안 먹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들과도 함께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마음가는대로 싫으면 싫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이런 저에게 예수님의 오늘 복음은 참으로 제 마음을 무겁게 하고 불편하게 합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지만 그렇지 못한 저를 향해 예수님은 <모르면 책임이 없지만,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은 사람은 매를 더 많이 맞을 것이다.>(Lk12,48)고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10,25)하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고, 그 교사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십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배운 바를 바탕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0, 27)라고 응답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한 해답으로 제시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교사의 대답을 옳은 답으로 인정하시고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 28)하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엔 루가의 편집의도가 들어납니다. 루가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실천>, 즉 앎을 행동으로 실천해야함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더욱 루가 복음사가는 율법교사의 입으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10,29)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함으로써 그 구체적인 참된 사랑의 실천방법을 예수님께서 가르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시고, 이를 통해서 성경의 가장 의미롭고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가 제기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이웃이란 통상적인 개념, 곧 <서로 가까이 인접하여 사는 집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뛰어넘은 새로운 관점에서 이웃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즉 <누가 나의  이웃인가?>와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결국 <이웃>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기준으로나, 타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도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나의 도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장소적 즉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지만 이를 넘어서서 <지금 여기서>라는 실제적으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웃이며, 그에 대한 나의 응답이 참된 사랑의 실천이라고 제시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이웃사랑이란, 지금 이 곳(=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서 죽게 된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은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셋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는 그 사람을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10,31.32)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라는 표현이 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단지 사제와 레위 두 사람의 방향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의 상태와 행동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어떤 연유에서 <그 사제>는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 사제의 평소의 의식과 행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제는 위급한 사람이 보이기보다는 <누구의 주검이든 그것에 몸이 닿는 이는 이레 동안 부정하다.>(민19,11)는 율법 규정이 먼저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저처럼 가장 사제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참으로 자비하시고 사랑스런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대리자로써는 적합한 사람은 아닌 듯싶습니다. 레위인은 본디 성전에서 종사하는 사람이며,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고도 십일조를 받아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괸시리 복잡한 일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 또한 가엾은 마음이야 있었겠지만, 마음 보다는 머리가 우선하고 몸이 따르지 않았기에 보지 않은 척, 길 반대쪽으로 결국 오던 길로 지나가 버림으로써 스스로 초주검을 당한 사람의 <이웃 됨>을 거부하였고, 그 사람의 필요를 외면함으로써 이웃 사랑의 실천의 실패 곧 사랑을 완성할 기회를 박차버린 것입니다. 이 비유의 반전은 바로 사제와 레위인과 달리 유다인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인이 바로 초주검을 당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고, 실제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종교, 인종, 이념, 신분, 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바로 사마리아인처럼 <지금 여기서> 자신을 필요한 사람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주고, 그의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베푼 것을 되받으려하지 않았으며, 단 한 번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머물며 쉴 곳을 마련하는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초주검을 당한 사람이 온전히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돌봄>으로 그의 진실한 마음과 행동의 순수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마리아인과 초주검을 당한 사람의 관계는 바로 <예수와 상처받은 모든 인류>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흔히 소극적 구원과 적극적 구원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소극적 구원이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서 살려 내줌>이라면, 적극적 구원이란 <물에서 살려 낸 그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그에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마리아인의 사랑에는 이런 복합적인 사랑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시 그 길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을 당한 사람일 수 있고 또 강도를 만나 초주검을 당한 사람을 만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건 우리 모두는 아는 만큼 실천해야 하고, 실천하는 만큼 아름다운 세상, 사람다운 냄새가 풍기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리라 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은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늘 우리 곁에 계시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신앙의 신비를 마음에 깊이 새겨 나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