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by 언제나 posted Oct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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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신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내게는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성인들은 하늘에서 내려 온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성인들은 우리들처럼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들 중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 하느님은 처음부터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이나 당신의 은총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살려고 노력할 것인지를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미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아직은 부족하고 모자란 존재이지만 당신의 이끄심에 신뢰하고 의탁할 수 있는 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시몬과 유다 사도 역시 인간적 약점과 부족함을 갖은 분들이었기에 다른 사도들처럼 두드러진 활동이나 활약은 전해지고 있지 않았지만, 두 사도는 분명 자신들의 한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살려고 최선을 다하며 충실하게 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도 시몬(=응답하셨다, 들음이란 뜻)은 가나안 출신으로서(Mt10,4;Mr3,18) 열혈당원이었습니다.(Lk6,15;사도1,13) 유다(=존경받는 또는 찬미하리라는 뜻)는 타대오(마음이 크고 높음이란 뜻)라고도 불리는데, 그는 모든 사도들의 이름이 나타나는 구절과 예수의 형제들의 이름을 열거한 <예수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Mt13,55)라는 구절에만 이름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Lk6,12~19)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열 두 사도를 뽑으시기 전에 먼저,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다.>(6,12)고 전하고 있습니다. 늘 기도하신 예수님이지만 밤새도록 기도하신 것은 제자들 가운데 사도들을 뽑는 일은 예수님 자신에게서는 가장 중요한 일 곧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데 초석과도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빠 하느님께서는 이미 자신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셨지만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하느님의 포도원을 경작할 성실한 일꾼으로 적합한 자질과 소양을 겸비한 인재를 발탁할 수 있는 힘을 청하셨던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세상적인 나라를 다스릴 인재를 등용하는 기준과는 다른 영적인 자질을 갖춘 사람을 선택하고 선발하기 위한 신중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라고 느껴집니다. 애시 당초부터 적합한 사람이 어디 있었겠어요. 쓸 만한 인재들은 아마도 이미 <부모 찬스: 일명 자녀 스펙용 무더기 사례>를 활용해서 좋은 곳에서 좋은 대우 받으며 출세가도를 걷고 있지, 변방의 인물인데다 아직 불확실성을 다분히 갖고 있는 예수님을 따랐겠어요. 시체 말로 <인재 pool>이 빈약한 상태에서 예수님은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사도들을 선발하고 선택에 있어서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고심한 것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고심 보다 무엇이 아빠 하느님의 뜻일까에 대한 심사숙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제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알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서 아빠 하느님이시라면 누구를 원하실까 기도하셨던 것으로 저는 확신합니다.

 

결국 그런 예수님의 뜻이 사도들을 뽑고 발표하신 인물들의 면면으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출신 배경이나 직업, 배움 그리고 성격내지 인성 면에 있어서도 과히 천하의 인재들을 등용했다고 활동 초기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신과 함께 파스카의 여정을 겪고 난 뒤 비로소 성령을 통해서 그들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확연히 증명되었으니 말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사도 시몬은 열혈당원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 유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허나 그들은 비록 부름을 받았을 때 부족하고 나약하며 허물이 많은 분들이었지만 성령을 받고서는 참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투철한 믿음을 바탕에서 하느님의 뜻을 죽음으로 증거한 분들이었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투철하신 안목에 감탄할 뿐입니다.  

 

오늘 독서 에페소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 공동체를 건물에 빗대어 설명하시는데,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2,20)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교회라는 건물은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세워지고 연결되어서 자라나며 하느님께서 자리하시는 하느님의 참된 성전이 됩니다. 어느 성당 제의실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하군요. <하느님은 가끔씩 사람들에게 빵 대신 돌멩이를 던지곤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그 돌을 원망하여 걷어차 버리다 발가락 하나가 부러지고 왜 어떤 사람은 그 돌을 주춧돌로 만들어 집을 짓는지.> 오늘 복음의 한 문장과 위 문장을 함께 연결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다음 <열 두 개의 돌멩이를 세상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 돌멩이는 어떤 것은 모난 것, 예쁜 것, 둥글넓적한 것, 뾰쪽한 것, 깨진 것, 큰 것, 작은 것 등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지극히 하찮고 평범한 것 같은 돌멩이 열두 개를 기초로 삼아 교회라는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의 모난 돌멩이는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예수님의 가슴을 세차게 때리고 밭에 버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돌멩이 하나가 그 빈자리를 매웠지요. 이렇게 열 두 개의 돌멩이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비록 못생기고 모난 돌이라 해도 예수님의 눈에는 교회라는 건물의 아주 쓸모 있는 기초로 쓰여 질 수 있는 유용한 돌멩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교회라는 건물의 주춧돌로 쓰시고자 불러주시고 뽑아 주셨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하느님의 성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각자도 사도들과 더불어 교회의 재료로 쓰임 받고 있음에 감사하고, 우리를 필요한 곳에 적절히 당신 도구로 선택해 주신 예수님께 다함께 토마스 머튼의 <신뢰의 기도>를 함께 바치도록 합시다.

 

<내 주, 하느님 제가 어디로 가야할지 제 앞에 어떤 길이 놓여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어디서 끝이 날지는 전혀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은 제 자신도 알지 못하고, 제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따르려는지도 모릅니다. 하오나, 주님. 저는 당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으며, 제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런 소망이 표현되기를 바라고, 그런 소망을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비록 제가 아둔하여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올바른 길로 저를 인도해주옵소서.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주 하느님께 신뢰심을 잃지 않게 해주소서. 그러 하오면, 주여. 저는 행복하겠나이다. 아멘.>

 

* 오늘 유다와 시몬의 축일을 맞는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하루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