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간 수요일

by 언제나 posted Nov 1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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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질병에 걸린 적이 없는 건강한 사람들은 마치 한 번도 여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과 같습니다. 앙드레 지드는 그의 일기장에서, <질병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열 수 없었던 문을 열어 주는 열쇠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허나 심각한 질병 곧 인간성마저 모조리 망가뜨리는 가장 심각한 병일 경우에도 해당될까 의문을 가집니다. 예수님 시대엔 나병만이 아니라 많은 질병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나환우들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아주 심각한 사회적 질병이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채 외딴 곳이나 소록도에서 외롭고 힘겹게 살다가 세상을 떠나가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지드가 말한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 열쇠와 같은 기능을 했었을까요?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 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이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위 시는 천형의 시인이라 불리었던 한하운의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의 한 부분입니다. 일생을 나환자라는 멍에 속에 살다 간 시인의 한이 명징한 유리 조각처럼 아프게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한과 설움은 오늘날의 현실만은 아니며 예수님 시대에도 이 병을 앓다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음보다 더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허나 고통이 아문 지금에 와서야 어제를 되돌아 보면, 질병이 제게 새로운 문을 열어 준 열쇠였음을 인정합니다.

 

오늘 복음(Lk17,11~19)은 이렇게 사람이면서 사람처럼 살지 못하고 살아왔던 나병 환자들처럼, 우리 역시도 이 땅을 살아오면서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보살핌을 받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에도 너무나 자주 인생에서 참으로 받은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를 깨우쳐 줍니다. 그러기에 나병 환자 열 사람 중에서 죽음과도 같은 나병으로부터 치유 받고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를 드린 나병 환자는 한 사람 사마리아인뿐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무심하고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새로운 시선에서 깊이 반성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나병 환자들이 멀찍이 서서,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7,13)라고 소리 높여 울부짖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앙드레 지드는 <지금껏 한 번도 앓아보지 않은 사람은 수많은 고통에 대해 공감할 수 없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나병 환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셨기에 그들을 나병에서 깨끗하게 낫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17,15~16) 그러자 예수께서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말이냐?>(17,17~18)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 어떤 씁쓸함을 느낍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병 환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무슨 찬양을 받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살아온 삶의 어려움과 고통을 공감하시고 그들을 낫게 해 주신 것입니다. 허나 이 상황을 맞아 제자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은 것이라 봅니다.

 

사람이 참으로 사람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 아홉은 단지 자신들의 깨끗하게 치유 받은 것에만 급급하다 보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해 되돌아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질병으로 짓눌려 살아오면서 참으로 인간다움의 미덕인 감사할 줄을 잃어버렸고, 나병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신경의 무감각이 마음의 무감각으로 바뀌어졌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들은 외적으로 나병을 치유 받았겠지만, 내적으로 사랑과 은혜 받음에 감사하고 감격할지 모르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곧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내적 상태를 엿볼 수 있는 힌트는 바로 <사람이 깨끗해지지 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17,17~18)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들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치유 받은 나병 환자 열 사람 가운데, 진정으로 외적인 나병은 물론 내적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고 기억의 치유마저도 나음을 받고 참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입니다. 그는 받은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감사할 줄 모르는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상처는 치유 받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병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차이는 바로 감사에 있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아름다운 말은 <감사합니다.>라고 저는 믿습니다. 감사는 기쁨을 그리고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5,16-18) 우리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배운 것은 인생은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이렇게 단 일회적인 인생이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받은 모든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며, 감사할 줄 알 때 매일 매일 기쁨이 넘쳐날 것이며,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께 기도하며 찬양과 영광을 드리게 될 것이며, 그러한 삶은 이미 하늘나라를 앞당겨 사는 것이라 봅니다. 우리 모두 모든 일에 감사하며 늘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찬양하는 삶을 살고, 행복한 사람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