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월요일

by 언제나 posted Nov 1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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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Mt15,14)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종교인이나 정치인들에게) 상황을 두고 말씀하신 듯 싶어집니다. 인도하는 눈먼 이야 어차피 눈먼 이니 그렇다 하자고요. 문제는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따르는 사람은 왜 눈먼 이를 따르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고 살았는데 요즘의 세상을 보면서 이해가 됩니다. 아마도 따르는 자 역시 눈먼 이(=영적 소경)이기 때문일 것이며, 결국 눈먼 이이기에 눈먼 사람의 인도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따르는 사람 역시 눈먼 사람이기에 눈먼 사람의 인도를 받게 되고 결국에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신세가 되는 게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눈먼 이를 예전에는 盲人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맹인을 파자하면 눈(目)이 망(亡)했다는 뜻이며, 눈이 망했기에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흔한 표현으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곧 모르기에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며, 결국 보지 못해서 영적으로 눈먼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이 말까지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다음엔 귀머거리(=영적)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말소리는 들리나 말의 본질과 의미, 더 나아가서 참 뜻을 헤아려 알아듣지 못하면 귀머거리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늘 복음(Lk18,35~43)은 예수님께서 눈먼 이에게 광명을 되찾아 주신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배경이 되는 곳은 바로 예리고이고, 예루살렘을 향하던 예수님께서 그 도시에 당도하셨다는 소식을 어떤 사람이 눈먼 이에게(=Mr10,46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18,37)고 알려 주자, 그가 주저함이 없이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8,38)하고 부르짖음으로 예수님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물론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본디 그는 태중소경이 아니라 볼 수 있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언급이 없지만 시력을 잃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은 표현 곧,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혹 다시 보게 되었다.>(18,41.42.43)라는 언급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태중소경과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시력을 잃었을 경우에 고통과 아픔이 더 클까라고 묻는 게 어리석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제 생각에는 후자가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성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만, 그는 지금 상태에선 볼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지만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감각을 상실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감각이 더 발달하고 민감해지는 경우를 종종 신체 장애인들에게서 봅니다. 그는 분명 들을 수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는 꾸짖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큰소리로 울부짖음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 하는 점은 성서가 우리에게 신앙 곧 믿음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하는 감각기관은 귀이며 귀는 청각 기능을 의미합니다. 귀는 곧 들음을 말합니다. 곧 구원은,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한다는 진리입니다.

 

예리코의 눈먼 이는 눈으로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이미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있었기에 그에게, 예수님은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8,42)고 말씀하신 깊은 의도를 한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기적 사화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름과 보상>(18,28~30) 그리고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심>(18, 31~34)을 언급하셨지만,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다.>(18,34)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예리고 소경의 치유는 단순한 치유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참된 제자의 표상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의 마지막,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18,43)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먼 이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 바라느냐?>(18,41)라고 묻자 그는 거침없이 즉시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물론 그에게는 아쉬운 것이 너무 많고 필요한 것도 너무 많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여러분에게 만일 지금 예수님께서 동일한 질문을 던지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까요? 분명 예수님은 그 눈먼 이가 무엇을 필요한 지를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한지를 아시지만 무조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를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질문하시는 예수님과 대답하는 눈 먼 사람 사이에 이미 내적 교감을 통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며, 이는 또한 그 한 사람에게 향한 질문이나 대답이 아니라 당신을 믿고 따를 우리 모두에게 향한 도전이자 선택이며 믿음이라고 봅니다. 예수님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Jn14,6),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jn8,12)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예리코의 눈먼 이는 예수님과의 만남과 예수님께 대한 신뢰에 찬 믿음의 고백으로 이미 주님의 빛 속에서 생명의 길을 걷게 된 참된 제자이며 믿음의 사람입니다.

 

뜬 눈(目)을 가졌다고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 뜬 장님 곧 영적 장님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처음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볼 수 없을 때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은 볼 수 있었지만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고, 들을 수 있었지만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했다는 사실이며 이런 상태는 결국 우리의 신앙의 현실입니다. 예리코의 눈먼 이는 시력의 상실을 통해서 얼마나 볼 수 있다는 게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고, 비록 부족하지만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해서 믿음을 고백하게 되고 <제대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봐야 하는 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을 만나서 영적 소경의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제대로 볼 수 있는 하루가 되도록 노력합시다.<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