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길

by 후박나무 posted Mar 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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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자기중심적 프레임에 갇혀 산 사람에겐 하루하루 매일 매일이 다 좋은 날이라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같은 말은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한 우리들 대부분은 토마스 하디의 소설 ‘귀향’의 테스처럼 자신에게 그토록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건만 태양은 아랑곳없이 여느 때처럼 밝게 빛나는 현실에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철이 든다고 할까,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뼈아프게 배우게 된다.

 

이런 젊은 날의 깨우침은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주되어 다시 연주된다.

 

늙어가는 길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도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그리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못지않은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스코틀랜드 어느 양로원 할머니의 시>

 

처음 가는 ‘늙어가는 길’에서 보는 꽃이라 그런지 봄이라 해도 도무지 봄 같지 않네.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북녘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앞으로 몇 일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오의(奧義) 그리고 진수(眞髓)를 상징과 전례로 집약한 성. 삼일을 지내며 자신들이 믿는 바를 다시 밝히고 확인할 것이다. 회원의 상당수가 늙어가는 길에 선 우리들에게도 왕소군이 오랑캐 땅에서 맞은 봄이 봄같지 않았던 것처럼 익숙했던 성. 삼일의 전례와 내용이 문득 낯 선 도전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