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

by 후박나무 posted Aug 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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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다른 생각을 한 것 같은데 한주일이 넘게 흘렀다. 무더위와 싸우기에도 벅찬데, 일본의 올림픽소식, 코노라 감염증 확진인원수등 뉴스가 난무하니 자칫하면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마르코 복음 5장의 게라사 광인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인 듯 싶다.

 

우리와 게라사광인의 가장 기본적인 공통점은 “내속엔 내가 너무나 많아” 타인이 쉴 곳은커녕 자기가 쉴 곳도 없다는 점 그리고 당연히 제정신이 아니기에 자신을 모른다는 점이다. 로마의 한 군단을 라틴어로 legio라 한다. 군단이란 전투병은 물론 교량과 도로를 정비하며 성벽을 부수는 기구를 만드는 공병을 위시하여 취사, 보건 등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부대로 약 10,000 명 이상으로 편성된다고 한다. 이 마귀의 이름은 그 수가 하도 많아 레기온이라 한다는데 한 사람 안에 대략 10,000 이 넘는 캐럭터가 산다니 온전하다면 이상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될까? 중대, 대대? 면면한 시간의 흐름은 이어지지 않고 한 캐럭터가 전면에 나서 주인공 역할을 할 때와 다음 순간 다른 캐럭터가 전면에 나설 때 다른 순간으로 대체되며 전체적으로 보면 토막 혹은 파편의 더미가 남는다. 이런 삶의 방식으로는 영원한 생명의 그림자도 못 볼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공존하며 면면히 있는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어린왕자에게 여우가 가르쳐준 마음의 가르침중 하나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판 샘에서 물을 길어 마셔야 된다. 숨겨져있는 우물이 사막을 신비스롭게 하듯, 그 안에 자신만의 샘을 지닌 사람 또한 신비스러움을 자아낸다. 참새도 집이 있고, 제비도 새끼 두는 둥지가 있사와도 제게는 당신의 제단이 있나이다. “ 그의 샘터는 샤르댕 신부의 표현처럼 보잘 것 없는 봉헌물이지만 거대한 봉헌물이 바쳐지는 제단이다. 샘터라는 상징물과 함께 구약성서에서 타작마당은 제단으로도 쓰였다. 내일은 예수변모축일이다. 예수도 사막처럼 그 안에 감춰진 제단이 있었고 그의 궁극적인 제물은 자기 자신이었다. 다음은 떼이야르 샤르댕 신부의 기도이다.

 

세계위에서 드리는 미사

 

주님, 이번에는 앤(Aisne) 숲 속이 아니라 아시아의 대초원 안에 들어와 있지만, 또다시 저는 빵도 포도주도 제단도 없이 이렇게 서서, 그 모든 상징들을 뛰어넘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순수 실재를 향해 저 자신을 들어 올리려 합니다. 당신의 사제로서, 저는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세상의 온갖 노동과 수고를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저쪽 지평선에서는 이제 막 솟아오른 태양이 동쪽 하늘 끝자락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불이 찬란한 빛을 내며 떠오르면, 그 아래 살아 있는 땅의 표면은 다시 한 번 잠에서 깨어나 몸을 떨며 또다시 그 두려운 노동을 시작합니다. 오 하느님, 저는 새로운 노력이 이루어 낼 소출들을 저의 이 성반(聖盤)에 담겠습니다. 또 오늘 하루 이 땅이 산출해 낼 열매들에서 짜낼 액즙을 이 성작(聖爵)에 담겠습니다. 이제 곧 지구 곳곳으로부터 올라와 '영(靈)'을 향해 모아질 온갖 힘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는 영혼의 깊은 속, 그것이 저의 성반이며 성작입니다. 새날을 맞이하라고 지금 빛이 흔들어 깨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들과 신비로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저는 지금 저를 먹여 길러 주고 또 저의 삶을 풍요롭게 하도록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하나하나를 보며 사랑합니다. 그 다음으로, 저는 또 다른 가족을 떠올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마음, 학문 연구, 사상 등의 동질성을 통해, 너무나 다른 요인들을 묶어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가족이 울타리인 듯 저를 서서히 에워싸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 좀 더 막연하고 일반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고 모두를 감싸 안으면서- 일일이 그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살아 있는 인류 전체를 저의 눈앞에 세웁니다. 제가 알지 못하지만 저의 가까이에서 저를 도와주는 사람들, 오는 사람들과 가는 사람들, 누구보다도 사무실, 실험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진리에 대한 꿈을 가지고, 혹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지상 현실의 진보를 정말로 믿는 사람들, 그래서 오늘도 빛을 향해 열정적 탐색을 계속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가지런하거나 혼란스럽거나 간에, 쉬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 거대한 군중 앞에서 저는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특별한 요동도 없이 나아가는 이 거대한 물결 앞에서는 믿음이 굳은 사람이라 해도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저의 온 존재가 바로 이런 깊이에서 올라오는 속삭임에 공명하는 것입니다. 이 하루 동안 더욱 커질 모든 것들, 이 하루 동안 더욱 작아질 모든 것들, 오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들까지도 주님, 이 모든 것을 한껏 저의 품속에 끌어 모으려 하는 것은, 그것들을 당신께 봉헌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저의 봉헌물이고, 당신께서 바라시는 단 하나의 봉헌물 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기네가 수확한 것 가운데 맏물을, 또 가축들 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을 당신의 성전에 봉헌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봉헌물, 신비롭게도 당신께서 배고픔을 달래고 목마름을 해소하시기 위해 날마다 필요로 하시는 봉헌물은 이 세상의 성장, 우주 만물의 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 성장뿐입니다. 주님, 새날의 첫 새벽에 당신께서 만드신 창조계 전체가, 당신의 이끄심에 따라 움직이며 모든 것을 다 올려 봉헌하는 이 거대한 제병(祭餠)을 받으소서. 저희의 노동인 이 빵이 그 자체로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부스러기일 뿐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고통인 이 술 역시 다음 순간에 사라질 하찮은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볼품없는 물질 덩어리 그 깊이에 당신께서는 거룩함을 향한 어떤 억누를 수 없는 갈망을 숨겨 두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느낌으로 감지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저희는 모두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를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제가 비록 당신의 성인들처럼 영적 열망을 지니지도 그분들 같이 드높은 순결에 이르지도 못했지만, 당신께서는 저에게 칙칙한 물질 덩어리 속에서 꿈틀대는 모든 것들을 향해 억누를 길 없는 애정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천국의 자녀이기보다는, 비교 할 수 없이 더, 땅의 아들임을 의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늘 아침 제 어머니의 희망과 비참을 가슴에 품고 마음속으로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렵니다. 거기서 저는 - 당신께서 제게 주셨다고 확신하는 사제품의 힘을 빌어 - 떠오르는 태양 아래 인간 육체의 세계에서 이제 곧 태어날 것과 죽어 갈 것을 위해 '불'을 끌어내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