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행복 강의 4: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by 이보나 posted Feb 10, 202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참 행복 강의 4: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와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

 

 

시편 27, 7 ~ 8. 13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옵소서.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리라 믿습니다.> 시편 24, 3~4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행복한 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찾고 마침내 하느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6, 16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남성은 해마다 세 번씩, 곧 무교절(=과월절)과 주간절(=추수절)과 초막절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곳에서,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에 근거해서 하느님 앞에 나와 경배하였습니다. 시편 42, 2~3,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전통은 바로 귀양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로 ‘언제 예루살렘에 가서 공식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라는 바람이 담겨있습니다. 아울러 시편 17, 15절에서 시편 작가는 확신에 차 과감하게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 뵙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으로 흡족하리이다.>고 갈망을 고백합니다. 욥 역시도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19,26~27)는 절규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뵙고자 하는 희망의 기도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신약에서 메아리 되어 다시금 울려 퍼집니다. 1코 13, 12 <그때에는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이다.>, 히브 12, 14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 1요 3, 2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로서 강생 육화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1,18)고 이 신비를 알려줍니다. 더더욱 예수님 스스로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10,23~24)고 이 신비의 은총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더 직접적으로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14,9)고 가르쳐 주셨으며, 이를 토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1요1,1)고 증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뜻은 시편 15, 24, 51, 73장에 보면, <올바른 마음의 지향>을 가졌을 때이고, 그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무에서 깨끗함이 아니고 보다 깊은 뜻으로 깨끗한, 올곧은, 순수한, 계산하지 않는 마음,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마음과 같습니다. 이런 마음과 반대되는 마음은 <빗나간 마음, 비뚤어진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마음의 밑바닥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오염되지 않은 마음의 심저心底, 심층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마음이 진정 깨끗한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순수하십니다.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 8, 46 <너희 가운데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고 입증할 수 있느냐?>고 주님은 자신의 무죄함을 선언하셨던 것처럼 의로운 주님과 깨끗한 주님은 같은 분이십니다.

 

마태오 6장의 예수님께서 권고한 자선-기도-단식은 사람의 눈에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내면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행하기를 권고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실행하기란, 마음이 밑바닥까지 깨끗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깨끗한 마음 안에 깨끗한 행실이 함축되어 있으며, 깨끗한 마음이 내적 자세라면, 깨끗한 행실은 이 내적 자세에 부합되는 외적 행위요 일들입니다. 이는 루카 18장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통상적인 죄의 수준에서 보자면, 바리사이는 율법을 준수해왔기에 ‘죄없음’으로 인정받겠지만, 세리는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기에 ‘죄있음’으로 판단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면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에서 보자면, 바리사이는 자만과 교만으로 심보가 고약했기에 마음이 깨끗하지 않다고 판단 받았지만, 세리는 겸손한 처신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기에 마음이 깨끗하고 곱다고 인정받았습니다. 결국 마음의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에서 보면 마음이 깨끗하다고 인정을 받고 돌아간 사람은 결국 세리였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깨끗함은 죄의 수준(=외적 모습, 행동)에서가 아니라 내적인 마음가짐, 마음 태도, 마음씨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주님은 규정, 질서, 가치를 무시하지 않았으나 초월하시기에 다른 차원에서 사람의 겉이 아닌 속내를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선적으로 마음을 깨끗이 할 때, 행실도 깨끗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23,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보면, 로마 14,14의 음식에 관한 규정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 티토1,15에서 바오로 사도는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러워진 자들과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결국 하느님 면전에서, 중요한 점은 외적인 겉치레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사무엘이 기름받을 사람을 선별할 때,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16,7)고 주님 직접 말씀하셨으며, 그러기에 예레미아 예언자는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예17,10)고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마음이 순수해야지 규정을 어기거나 죄를 짓지 않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밑바닥이 문제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란 자신의 마음에서 온갖 거짓들과 악한 성향을 뿌리 뽑으려는 노력을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을 정화하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시24,4)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를 조심스럽게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는가?> 예수님은 단순 명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7, 20~23) 주님께서 가르치신 의도를 헤아려서 수시로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내 마음은 맑고 밝으며 깨끗한가? 아니면 불순하고 어두우며 깨끗하지 못한가? 그렇다고 해서 속마음을 보시는 주님 앞에서 걱정하거나 안절부절 말고 주님의 자비에 맡기도록 합시다.

 

사도 베드로는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1베2,11)라고 권고하였으며, 실재적으로 끊임없이 육적인 싸움을 해왔던 성 아오스딩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나를 사로잡았고, 나를 몹시 괴롭혔던 것은, 만족할 수 없는 정욕을 실컷 채워보려는 습관이었다.>(고백록10권12장) 이런 사도들과 성인의 권고를 바탕으로 독신자와 기혼자 사이에 어느 쪽이 더 순수하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속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성생활을 하고 산다고 해서 하느님께로 멀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 성생활 여부는 죄의 유무와 연관성이 없습니다. 제가 어느 책을 읽으면서 문득 미국에서 유학하던 중 체험했던 기억(1984년), 당시엔 제가 느꼈던 당황스런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어느 수녀는 우연히 그룹 대화 중에 함께한 그룹원들에게 느닷없이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이야 열린 세상이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시 핏츠버그 주교좌 성당에서 세족례를 할 때, ‘왜 여성들은 참여할 수 없는가‘라고 여성 수도자들이 앞장서 시위 아닌 시위를 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여성들도 성목요일 세족례 때 별 부담없이 세족례를 하잖아요. <왜 동정 순교자들에 대한 글을 교회는 읽도록 권장하죠! 이런 일은 참으로 평범한 여성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마치 성녀가 되려면, 거룩해지려면 ‘처녀’여만 하는 것처럼 말이죠. 순교라면 더 좋겠죠. 그렇지만 대다수의 여성은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재작년 우연히 읽었던 책에는 이런 발언을 한 수녀가 성녀 체칠리아를 묘사한 기도문을 인용하였더군요. <성녀는 동정성을 보존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순교한 그리스도 영성의 완전한 본보기이다.> 그 수녀가 주장한 바는 ‘결혼한 여성들은 그리스도 신앙의 불완전한 존재인가’ 라는 지적이며 항변이었습니다. 사실 교회는 오랫동안 은연중에 여성에게는 <순결을 보존하는 사람은 완전한 존재이며 더더욱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죽을 만큼 가치가 있다.>고 강조해 왔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각자가 판단하시기 바랍니다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성생활의 유무와 관계없이 깨끗함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내 마음은 주님을 모시고 살고 싶습니다. 순수-진솔-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살고 싶습니다. 파스칼의 <팡세>의 한 부분을 낭독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을 숭배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는 말은 진실이다. 이 어려움은 인간 내면에서 발원하는 종교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반 종교심에서 기인한다. 만일 인간의 오각五覺이 참회 기도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타락이 하느님의 순수하심을 해방하심을 훼방 놓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도 인간에게 고통을 주지 못할 것이다. 단지 인간의 고유한 속성인 사악함이 하느님의 은혜에 저항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겨 진다. 그러나 이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 뒤집어씌우려는 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어 주시고 세상은 우리를 뒤로 잡아끌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어린애와 같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강도들의 손아귀에서 자식을 되찾아 온다. 어린애는 어머니의 자유를 갖다준 어머니의 사랑의 매를, 진정한 매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자기를 강제로 가두고 폭군처럼 충동적으로 매질하는 강도들의 폭력을 혐오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 인간들과 벌이실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전쟁은 그분께서 이 세상에 가져오셨던 전쟁을 인간들에게서 앗아 가는 것이다.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전쟁을 주러 왔다. 너희에게 전쟁을 가르치러 왔다. 평화가 아니라 불과 칼을 주러 왔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거짓된 평화 속에 살았던 것이다. >

 

파스칼의 고백처럼 저 역시 거짓된 평화 속에서 자신을 속이고 살아왔지 않나 반성해 봅니다. 더욱 프랑소와 모리악의 <내가 믿는 것>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면이 많았습니다. 그의 처절한 욕정과 싸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묘사합니다. <노년은 시험이 두 배로 가중되는 위험한 시기다. 왜냐하면 노인의 상상력은 자연이 허용하지 않는 끔찍한 방법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다른 소설에서도 정욕, 억압, 성적인 분노를 그려왔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소설에서는 성적유혹은 익숙한 전쟁터였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가톨릭의 <결혼이 정욕을 치료한다.> 혹 <절제를 통해 정욕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적 욕구는 모든 훌륭한 의도를 다 쓸어가 버릴 만큼 강력한 파도와 같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만족은 일부일처제 안에만 있다.>는 말은 사실일 수도 있지만, 성적 욕구가 누그러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성적 순결에 관한 전통적인 논조의 무게를 달아 본 뒤, 그것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했는지 모릅니다. 모리악의 결론은, 절제, 억압, 이성적인 논리는 성적인 방종으로 향하려는 욕구와 충동과 맞서 싸울 적당한 무기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성적으로 순결해야 할 이유를 딱 하나 발견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모리악의 말을 빌리자면, <불순결한 상태는 우리를 하느님과 분리 시킨다. 물리적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은 확인이 가능한 법을 따른다. 순결은 훨씬 지고한 사랑의 조건이다. 다른 모든 것보다 우월한 대상, 바로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렇다. 이것이 핵심이다. 다른 건 없다.> 모리악을 통해서 저 역시 아직도 내적으로 성적인 욕구와 싸우긴 하지만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그 지고한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려면 <정결 서원>이 아닌 다른 길도 방법도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몸도 마음도 깨끗해야 하는 이유이자 동기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참된 평화와 하느님과 친밀한 사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St.Mary, 4세기 중엽-5세기 초)는 속죄하고 회개하는 자, 죄지은 자에 대한 하느님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을 나타내는 통회자의 본보기 중 한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열두 살까지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앙 교육을 받다가 집을 나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긴 세월 동안 매춘부로 살았습니다. 서른 살이 될 무렵 그녀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단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장엄한 의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성전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그녀에게 솟구친 무엇인가의 힘으로 그녀만 성전 안으로 발을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강한 통회의 감정이 가슴에서 솟아올랐죠. 성전 앞뜰 성모상 앞에서 더럽혀진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죄의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대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감실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는 순간 “요르단 강 건너 저 광야에 가서 고행하며 보속하라”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인간 욕망의 덧없음과 세속적 삶의 덧없음을 깊이 새기고, 참회의 삶을 위해 광야에 가서 47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는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 되느냐에 진정한 회심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상징적인 성녀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마음이 깨끗하신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가장 순수했던 때는 언제였다고 생각합니까? 저의 삶의 여정에서 보자면, 가장 깨끗했던 순간은 아마도 세례 때, 첫 서원, 서품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때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한 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어머니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과거를 되돌아볼 때 몸과 마음이 얼룩진 때, 상처받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께 이 마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싶습니다. 저는 루르드 성지를 네 번 다녀왔지만, 어쩌면 처음 루르드를 방문했던 1986년의 기억이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헨리 뉘웬이 말했듯이 우리는 어느 순간 <무죄함에로 초대받게 되는데>, 제게는 그때가 바로 루르드를 처음 방문해서 기적수에 침수할 때였습니다. 무죄함으로 거듭난 것 같았으며, 깨끗함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 가족의 일원이 될 것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성화와 신화가 된다는 신학적 바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빠 하느님과 나는(우리 각자는) 하나입니다. 마태 5, 45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는 말씀에서 단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당대 로마 시대의 관점에서 황제는 신의 아들이었고, 주된 소임은 평화를 유지하는데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하느님 백성 전체가 하느님의 아들, 자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 복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 곧 평화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은 초점은 <평화를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 pease 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화해를 촉진시키고, 그로써 서로 분열되거나 갈등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과 가정들, 사회 집단 간의 형제자매적 친교를 이룩하는 일입니다. 비폭력(=당하는 것)이 싸우는 것보다 힘이 있다는 믿음으로 사셨던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흑인의 인권신장을 위해 비폭력 운동을 실천한 미국의 킹 목사야말로 참된 Peace Maker입니다. 이처럼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죄는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 깨어짐이기에 예수님은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화해하라.>(마태5,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에서 평화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모가 난 것들과 가시가 돋친 것들을 부드럽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곧 분쟁을 종식시키고 화해시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가정과 친구들 사이에 더 나아가서 종교 간에 화해하는 방법을 복자 바오로 6세 교황은 <회칙 화해>에서 그 해답은 <대화이다.>고 제시하였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골1,20)고 평화와 화해의 긴밀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사람이나 생각을 통하게끔 만드는 것이 평화입니다. 사실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라기보다 일상적인 차원에서 평화의 반대는 불안, 초조, 걱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 4, 6절에서 평화를 말하면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4,7) 불안과 걱정은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과 모든 집단은 평화를 원하고 말하지만, 평화의 수준이 다르고 낮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신자들의 기도 내용이 사실 지극히 기복적입니다. 무사고(안정과 안녕), 질병과 죽음, 실패(=입학, 취직), 고통, 여러 가지 애로사항(물질적. 정신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서적 평화 곧 예수의 평화는, 마태오10,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루카12, 51~52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요한14,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먹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는 말씀에 분명하고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의 평화를 주러 오셨는데,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예수님의 죽음으로 가져다준 부활의 선물이며 이는 곧 성령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인데 이는 단순한 평화주의자들(=행동은 없는 단지 토론만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참된 평화의 일꾼은 예수님이셨고,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예수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앞에서 중립상태로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찬성이나 반대를 해야만 합니다. 참 평화를 이루기 위해 칼로 평화가 아닌 것을 단호하게 절단해야 합니다. 평화의 일꾼인 그리스도인은 관용과 화해를 추구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야 합니다.>(로12,18) 평화의 일꾼은 온유한 사람처럼 단순히 사람들과 편안하게 지내고, 불필요한 힘든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평화를 준비하고 실현하며,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불목이 있는 곳에 화해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평화의 씨를 뿌리고 화해의 물을 주고 친교의 열매를 맺는 사람과 같습니다. 평화의 일꾼은 먼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 곧 가정이나 공동체로부터 시작하고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우리의 평화이신 주님 안에 항구히 머물면서 일해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에2,14참조) 이렇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받을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아보는 모든 이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이름을 드높일 것입니다.

 

<영혼의 평화>라는 책에서 플톤 쉰 주교는 참 평화는 질서의 평정에서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질서의 평정에서, 感官이 이성에 종속되고, 이성은 신앙에 종속되며, 인간의 전존재가 하느님의 의지, 뜻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평화는 하느님께 대한 참된 귀의에 따르는 결과이며 열매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불안정, 초조와 걱정, 고통과 십자가에 의해서도 교란되지 않고 점점 심화, 내면화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에 적응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귀의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진 결실입니다. 영혼의 조화와 부조화는 결국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뜻과의 싸움에 따른 귀의와 일치의 부산물입니다.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서 이 상반적 평화를 봅니다.> 아울러 준주성범 제23장에서 평화를 얻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네 뜻을 따르는 것보다 남의 뜻을 받들기를 힘써라. 항상 많이 가지는 것보다도 적게 가지기를 원하라. 항상 낮은 자리를 취하고 모든 이에게 복종하기를 도모하라. 항상 하느님의 성의聖意가 완전히 네게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구하라. 이런 사람은 평화와 안정의 경계 안에 들어가리라.>(197쪽)

 

요한 23세 교황은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평화를 위한 4가지 지붕을 세우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4가지 기둥은 곧 진리, 정의, 사랑, 자유이며, 이 4가지 기둥을 세우면 하느님께서 평화의 지붕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4가지 기둥 없이는 평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할 때(=용서할 때) 얻어지는 것이 마음의 평화입니다. 비록 원하지 않았지만, 평화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미워할 때 불안이 옵니다. 그런 상태에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기둥을 세울 때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받습니다. 정의를 실천할 때 곧 양심적으로 옳은 일을 할 때 마음은 평화를 누리지만, 이에 반해 비양심적이고 불의한 일을 하고 나면 마음이 켕기고 불안해집니다. 이는 개인도 집단도 동일합니다. 진리를 실천할 때 참 평화를 누립니다. 진실이라면 양보하는 사람, 받아들이는 사람은 받아들일 때 속상하지만 마음은 평화롭고 자유롭습니다. 반면에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아닌 척 겉꾸미고, 거짓으로 변명과 핑계를 부리거나, 억지를 불으면 마음은 찝찝하고 꺼림직합니다. 자유로운 마음에서 하면 마음은 평화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하면서도 원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혹 마지못해서 할 때는 하고 난 다음에 마음이 불편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스스로 원하고 기쁘게 받아들여 ‘네’라고 응답할 때 평화롭습니다. 결국 우리네 삶에서 사랑과 진리, 자유와 정의의 기둥을 세울 때 참된 평화를 선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4가지 기둥을 세우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이며, 가족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자기 집에 있다는 느낌이며, <당신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편안하지 않습니다.>(고백록 1,1)라고 아오스딩 성인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란 RIP(rest in peace)란 유명한 어구처럼 제일 마지막에 찾아올 거니까요하느님 안에 쉬는 것이 마음의 불편함을 부숴 버리는 평화입니다. 마치 탕자가 다시 집으로 되돌아와서 느끼는 가장 강한 느낌은 마음의 평화이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이 함께 계실 것입니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강의를 마치면서 우리 함께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함께 바치도록 합시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Articles

7 8 9 10 11 12 13 14 1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