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 루카 20, 27 - 38

by 이보나 posted Nov 05, 202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삶은 은총이며 축복임을 새삼 강하게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 행복하게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삶이란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죽음이란 삶을 통해서 이해되고 완성된다고 봅니다. 죽음이 있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삶이 있기에 죽음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삶이며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위령성월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사두가이파 사람들 몇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우리는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인데, 당신은 부활을 이야기하시니 그 부활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는 것입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찾는 법이라지만, 그들의 질문하는 태도는 진지한 삶의 문제라기보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불순한 의도에서 시작된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서, 예수님은 생명이신 하느님의 자녀로 축복받는 삶의 자세를 제시하십니다. 본래 유다인들은 삶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향한 굳은 신앙이 있었지만, 율법엔 부활에 대한 어떤 언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두가이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사두가이 사람들은 후손에 관한 규정을 언급하고 있는 신명기를 근거해서 소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25장 5절에서는,『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죽은 그 사람의 아내는 다른 집안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남편의 형제가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시숙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두가이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20,29~33)

사실 신명기 25장 5절에 언급된 율법 규정은 아내를 한 인격을 지닌 사랑의 존재로 보지 않고 일종의 소유물로 바라보았던 부정적 시각에서 그 여자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사두가이 사람들은 그런 의도는 무시한 채 허구적 이야기를 갖고 부활에 관해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 나오는 일곱 아들이 순교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2마카 7,1~2.9~14)와 일곱 명의 남편을 둔 아내에 관한 사두가이 이야기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곱 아들을 둔 어머니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었으며, 일곱 아들에게 이렇게 신앙으로 격려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2마카7,22-23)

살아계신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죽음을 딛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주님 십자가 여정이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부활이 가져올 영원한 행복은 단순히 세상적 기쁨과 행복의 연장 선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부모, 형제, 부부와 같은 세상적 유대가 끊어지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영적 단계로 도약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인은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면, 부활은 죽은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전적으로 완전히 또 다른 삶인 것입니다. 부활은 살아계신 주님이 주시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는 사랑과 행복의 바다에 잠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이미 오래전에 땅에 묻혔지만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20,38) 하느님이 ”죽은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에“(20.38)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신앙의 눈을 뜨고 살아계신 주님이 어디에 현존하시는지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극심한 고통 중에 받았던 위로의 순간, 어려움을 겪고 있던 어둠의 시간에 체험한 은총의 빛, 주님이 주신 이런 행복의 순간을 기억해야 하고 이것이 삶의 뿌리가 돼야 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발견하고 체험하는 곳,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삶과 부활 신앙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2테2,16).

우리는 자주 죽어야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17,21) 그리고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심을 오늘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이는 곧 우리의 지상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한 이들이 어찌 저승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살아있는 지금 이곳에서 천국을 만들며, 천국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천국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가진 바를 나누고, 남을 배려하고 스스로 사랑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살아있다는 이 놀라운 은총과 축복을 감사하면서, 지금 있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임을 우리 삶을 통해서 증거 합시다. 

끝으로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세속성 곧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는 평신도인 여러분이 일상의 삶에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가오심'을 깨닫고, 자신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현존하게 하고 활동하도록 살아가는 게 참된 평신도의 역할이고 사명이라고 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신분에 명백한 규정입니다. 지난 시노드의 가장 특이하고 중요한 핵심은 <Synodalitas시노달리타스: 공동합의성>으로 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저에게 가장 흥미로운 관점은 교회 구성원인 사제-수도자-평신도가 친교 안에서 함께 참여하고 함께 경청하며 함께 논의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 코로나 펜데믹 이후 세상의 변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몸짓으로 예전처럼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가 함께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식별하고 대화하려는 시도라고 봅니다. 시노달리타스에서 가장 주목할 구성원은 바로 평신도들의 참여와 활동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런 점에서 금년 평신도 주일은 그 어느 때보다 의미로운 주일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세상 한가운데 살아가고 활동하는 여러분의 협력과 참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하느님은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빛으로 오실 수 있고, 세상의 오류와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될 수 있으며 교회를 성장하게 하는 누룩이 될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살려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길 바라며 기도합니다. 아멘. 


Articles

3 4 5 6 7 8 9 10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