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일: 루카 21, 5 - 19

by 이보나 posted Nov 1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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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어느 순간 벌써 가을이 저만치 밀려나 있음을 피부로 느낍니다. 이렇듯 우리 삶도 떨어지는 낙엽처럼, 움켜 진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인생의 가을이 물러나겠죠. 하지만 우리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맙시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하느님을 볼 수 있기에 더 이상 슬퍼하지 맙시다. 다만 윤동주 시인이 자신에게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하였는지 물어볼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라는 노랫말처럼, 우리 또한 우리 자신에게 사람들을 사랑했고, 최선을 다했으며 이런저런 열매를 맺었노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대답은 바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신앙인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이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하면,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성찰은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이제 자신은 회복되고 성령의 행복과 위로를 받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교회 전례 주년은 대림 시기와 더불어 시작하고 그리스도 왕 축일로 끝납니다. 다음 주일이 그리스도 왕 축일입니다. 예전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면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도입하기를 바라시면서, “전 세계 공동체가 가장 작은 이들과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리스도 사랑의 더없이 훌륭한 구체적 징표가 되기를 바랍니다.”고 선언하셨기에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변경한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양한 형태의 빈곤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의 필요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을 하느님의 시선에서 바라보도록 권고하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서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담아 잘 들어주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187항에서)

‘세계 가난한 이들의 날’의 취지를 마음에 새기면서, 여행을 좋아했던 저는 가끔 여행 에세이를 즐겨 읽기도 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알랭 드 보통’이 가장 좋아하며 추천하고 싶다고 말한 책인 ‘제프 다이어’의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여타의 여행 에세이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 이 책은 세계의 11곳을 여행하면서 느낀 작가의 시선을 모은 글들인데, 이 장소들을 관통하는 표제어(key word)가 ‘폐허’입니다. 이 책의 몇 대목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 어쩌면 고대 유적에서 배우는 가장 간단한 교훈은, 뭐든 수직으로 세운 것은(생략) 훗날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수평적인 것들이 주는 매혹에 저항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생략) 언젠가는 남은 유적들이 모두 사라져 사막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수평선을 방해하는 수직 기둥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것이 시간에 대한 공간의 최후의 승리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지적인 훈련과 야망들이, 심드렁했던 나태함 그리고 실망감 때문에 흩어지고 말았다는 것, 나에게는 목적도 방향도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삼십 대 때보다 훨씬 적게 생각한다는 것, 나 스스로 빠른 속도로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아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인용한 이 대목은 작가인 다이어를 여행으로 이끈 것이 바깥의 폐허일 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의 폐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폐허는 과거를 떠오르게 하지 않습니다. 그건 보는 이를 미래로 안내하죠. 거의 어떤 예언 같은 느낌입니다. 미래는 결국 이런 모습이 될 거라는 예언이요. 미래는 늘 이런 모습으로 끝났습니다.』라는 부분에 도달하면 독자들에게 지금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의 안팎의 폐허와 화해를 꾀하도록 초대합니다. 

지난 안식년 동안 북유럽과 남유럽을 여행하면서 느꼈던 점은 성전의 외부의 크기보다 내부의 화려함과 소박함의 차이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후 조건의 차이에서 그럴 수 있다고 보지만, 그보다는 북유럽의 교회들은 대부분이 루터 교회였고, 남유럽은 전부 다 가톨릭교회(=항해 시대의 부를 누린 국가)였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었다고 느껴집니다. 정말이지 남유럽의 내부는 화려함과 함께 웅장함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도입부에, 몇몇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보고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라고 성전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은 이미 미카, 예레미야, 에젤키엘 예언자들이 예고한 바 있었으며,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성전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재건된 제2성전을 두고 하는 말씀이며, 기원전 19년부터 헤로데 왕에 의해 확장되어 예전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을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로마군은 70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함으로써 예수님의 성전 파괴 예언은 이루어집니다. 제2 성전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부분은 오직 서쪽 벽(=통곡의 벽)의 일부로서, 지금도 유대인들의 희망과 순례의 중심이 되고 있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복구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자 그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런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21,7)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21,8)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의 당부 요지는 결국, ‘내가 그리스도다.’고 선언하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조선 말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세상의 변화와 위기 속에서 스스로 ‘재림 예수’라고 자처하는 사이비 교주와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떠벌리는 인간은 늘 상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이비 예수와 그리스도 그리고 거짓 메시아가 누구인지 식별할 능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표징들, 곧 ‘민족과 민족 간에, 나라와 나라 간에 전쟁;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 박해와 미움 등’을 언급하셨으며, 사실로 지난 2,000년 동안 이 모든 일이 거듭거듭 반복해서 일어났지만, 아직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참된 신앙인은 그때가 언제인지 어떤 표징이 일어날 것인지 관심하기보다 다만 지금 주어진 현실을 깨어 살면서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참된 준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루카 사가는 묵시문학이 전하는 종말은 이미 왔기에 갈팡질팡, 우왕좌왕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설계하는 자기중심적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를 살자는 삶의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당신의 참다운 미래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신앙인인 저희가 주인으로 행세하면,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시지 않고 미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사도 바오로가 “그날은 더디 오려니 하고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사람으로 살지 않고, 묵묵히 일하며 자기 할 바를 다하는 사람답게”(2테3,11.12참조) 살라는 권고를 마음에 새기면서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존재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현재 조건이 고통스럽고 암울할지라도, 삶에서 부대끼는 조건이 어둡게 보이고 불합리해 보일지라도, 그 밑바닥에는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희망과 기쁨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때론 세상에서 하느님의 미래를 앞당겨 살다 보면 “더러는 죽음을, 더러는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21,18)는 말씀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시며, 우리의 미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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