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일: 마태오 3, 1-12

by 이보나 posted Dec 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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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제 서품 기념일을 맞아 어느 수녀님이 제게 따끔한 충고와 함께 한 편의 시를 예쁘게 써서 보냈는데,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시는 일본의 미쓰하라 유리라는 분이 쓴 시 「길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맨 처음 길을 걷는 사람 훌륭해 그 오롯한 자세 정말 아름다워. 허나 그 뒤 이어 이름 따위 안 남을 줄 알면서도 꾸준히 길을 밞아 다지며 걸어간 이들의 소박한 걸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워.』 어쩌면 저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 추종의 길은 한 마디로 이미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묵묵히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시를 제게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오늘 복음(3,1~12)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길을 닦았던 세례자 요한을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려운 역사적 상황과 불안한 현실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게 구세주 오실 길을 닦았던 슬기롭고 정의로웠던 예언자이자,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하느님의 대변인이었습니다.
 
 많은 예언자가 첫길을 열고 그 길을 꾸준히 걸었던 것처럼,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목사도 그런 예언자적인 삶의 족적을 남긴 분이시지요. 킹 목사는 노예해방 100주년을 맞이한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의 연설 내용은 마치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평화로움을 보는 듯하며,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외침과 같은 감동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킹 목사의 연설은 평화의 꿈을 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과거에 노예로 살았던 부모의 후손과 그 노예의 주인이 낳은 후손이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형제애를 나누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꿈입니다. 흑인 소년, 소녀가 백인 소년, 소녀와 서로 손잡고 형제자매처럼 함께 걸어 다닐 수 있는 상황으로 언젠가 탈바꿈되리라는 꿈입니다. 지금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이 낮아지고, 울퉁불퉁한 땅이 평지로 변하고, 꼬부라진 길이 곧은길로 바뀌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생물이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리라는 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킹 목사의 꿈은 참된 꿈이요, 희망이라고 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나와 다른 인종과 종교, 부귀와 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 편협하고 편향된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 이기심과 배타적인 삶을 살지 않고 평화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모든 인류가 지향해야 할 꿈과 희망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증오와 미움, 전쟁의 살육과 인간 존엄의 차별이 없어지는 세상,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오도록 모든 인류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꿈이 현실화되도록 앞장서야 하며, 그 길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다가올 메시아의 평화로운 시대를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11,6~8)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어려운 시기일수록 인생의 스승이나 예언자들에게 길을 묻습니다. 우리는 길을 물어야 합니다. 인생의 길에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헤매며 길을 묻는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은 그 길을 말해줍니다. 자신은 길이 아닌, 다만 그 길을 마련하고 곧게 내는데 있음을 밝히고, 그 길을 향해 나가도록 길을 제시해 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마련한 길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진리와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그리스도’이시며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지난 21세기 동안 인류는 인간 존엄을 해치는 악의 길을 걸어왔고 지금껏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많은 그리스도인도 있었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뜨거운 회개로의 외침은, 그 모든 악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만연되어 있는 모든 이기적인 삶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거짓의 길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욕망의 길에서 돌아와 주님의 길을 닦으라는 촉구입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면서도 실천적 신앙의 삶과는 멀어진 우리 모두에게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3,7~8) 이와 같은 호된 욕을 먹었던 이들은 분명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가증스러운 위선의 탈을 쓰고 있었던 그들에게 참 신앙의 길로의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책은 세례자 요한 때 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오늘날 모든 신앙인에게 하는 회개의 질책이요, 경고입니다. 

예전 조정래 작가의 「정글만리」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참으로 중국과 제가 살았던 베트남의 현실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공통적인 면은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뇌물을 주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반대로 뇌물을 주지 않으면 무슨 법이 그렇게 까다롭고 절차가 복잡한지 보통 사람들은 지레 포기하던지 방법을 몰라서 못합니다. 이것이 권력의 힘과 돈의 힘이 유착하게 된 관계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의 힘을 빌려 돈을 모으고,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권력을 움직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후진 사회일수록 이런 퇴폐가 심하긴 하지만 그렇게 흉보는 우리 사회도 그런 면이 있기는 마찬가집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권력이든 금력이든 힘 있는 사람은 법을 어기면서까지 크게 해 먹고 법에 걸려도 쉽게 빠져나오지만 힘없는 사람은 작은 것 하나 걸려도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有錢無罪 無錢有罪!! 그러니 누구나 힘을 가지고 싶고 돈을 축적하려고 합니다.

이런 비판적인 강론을 하고 있는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제가 힘 있는 사람을 비판하지만 어떤 때 힘 있는 사람의 힘을 빌리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인데,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돈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힘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모순된 삶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저와 같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힘이 없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힘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힘이 있던 사람도 여기서는 힘을 다 빼야 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 이사야서 11장의 말씀처럼 마치 늑대와 표범이 이빨과 발톱을 빼고 새끼 양과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며 살모사가 독을 빼고 어린이와 어울리듯 힘을 다 빼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모인 곳에 어깨에 힘을 주고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처럼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곳에 힘을 행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힘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제1성으로 하신 말씀과 동일한 말을 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3,2) 그렇다면 하늘나라를 위한 회개는 어떤 회개입니까? 하늘나라에 합당한 회개는 존재적 회개요, 관계적 회개입니다. 그저 못마땅한 자신을 고치고 못된 습관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관계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사랑의 관계로 살아가는 그런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뱀은 물을 먹어 독을 만들고, 소는 물을 먹어 젖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물을 먹는데도 어떤 존재냐에 따라 남을 죽이는 독이 나오고 남을 살리는 젖이 나옵니다. 그러니 존재적으로 바뀌는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오늘 세례자 요한이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나무라듯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힘을 빼고 독을 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이것이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잘 준비하고 맞이하는 대림절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맨 처음 길을 열고 걸었던 사람들이야 훌륭하고 그 오롯한 자세와 마음이야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허나 그 뒤를 걷는 우리를 세상의 어떤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는다 해도, 이름 따위 안 남을 줄 알면서도 꾸준히 길을 밟아 다지며 걸어간다면 우리의 인생 또한 아름답고 행복하리라 봅니다. 우리 함께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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