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일: 마태오 1, 18 - 24

by 이보나 posted Dec 1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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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인생은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평탄하게 곧장 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좌절과 실패가 있는 부침의 여정이라는 의미입니다. 인생은 바로 이러한 좌절과 실패 앞에서 어떤 태도와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의 삶이 결정된다고 봅니다. 실패와 좌절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 이것이 신앙의 생활화라고 봅니다. 특별히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와 신약의 바오로 사도는 어떤 누구보다도 숱한 실패와 좌절,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불가능이 없다는 믿음을 삶으로 증거하신 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마태 1,20~24)는 천사가 요셉에게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했던 예언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고 전해 줍니다. 요셉에게 했던 천사의 말씀이 무슨 의미를 띄고 있는지,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 임금에게 선포하는 임마누엘 예언으로 잠시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포위된 상황이었습니다.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합동해서 남왕국 유다의 아하즈 왕을 공격하며, 그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다른 사람을 자신들의 뜻에 맞는 허수아비 임금으로 세우려 했지요. 적군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그 상태를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었다.”(7,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택하신 도성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전했지만, 아하즈는 그 말씀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었는데 말입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7,9) 그러나 아하즈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한 그 순간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표징이 바로 임마누엘의 탄생 예고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의 이름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약속을 요약해 줍니다. 적군이 시시각각 진격해 와도, 아니 설령 예루살렘이 어느 날 멸망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해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때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이 선포하는 기쁜 소식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지난 17일 들었던 복음(1,1~17)엔 아브라함에서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족보는 지금까지 이어온 틀에 따라 ‘요셉은 예수를 낳았다.’라고 하지 않고, 그 흐름을 벗어나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1,16)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탄생이 인간적인 경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밝혀주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요셉은 ‘남모르게’파혼하려고 했지만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신했다.”는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꿔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혈연으로 말하면 요셉은 예수님과 무관합니다.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붙임으로써 법적으로는 온전한 아버지의 자격을 지니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고, 이로써 인간의 삶 속에 엮어져 들어오십니다. 하느님은 인간 역사 한 가운데 사람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드러나십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요셉에게 약혼자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함께 전해 줍니다. 그 이름이 바로 “예수”입니다. 이 이름은 ‘주님은 구원이시다.’를 뜻합니다.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가 이어서 말하듯이,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1,21)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 것이 구원 상태라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에 매여 있는 이스라엘을 그 죄에서 풀어놓으심으로써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하시려고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함께 하시려는 것입니다.

포위된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던, 그래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 떨던 아하즈의 처지와 죄에 얽매여 구원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던 이스라엘의 처지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아니, 우리는 하느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분의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그들이 하느님 안에 살고 있음을 믿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벽을 쌓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멀리 계시지 않은데도, 인간은 하느님을 멀게 느끼고 멀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믿지 못한 그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은, 그들이 보고 믿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취하시고 내려오셔서 함께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하즈에게 대한 하느님 약속의 표징은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7,14)는 약속입니다. 그 아기가 바로 하느님께서는 어떤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아하즈와 함께 계시다’는 표징이었고, 유다의 미래를 위한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아기는,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느님이시며, 당신 스스로 인간을 죄의 속박에서 풀어내심으로써 인간이 당신 안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 아기를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을 우리는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진정한 메시지이며, 성탄의 의미입니다. 신앙은 믿어지지 않는 일을 맹목적으로 믿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분의 시선에서 그분의 눈으로 인간과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시선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만을 보고 놀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예수님 외에도 이적을 일으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가엾이 여기시며, 측은히 여기신 사실에 주목하고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의 근본이 하느님이고 그분은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역시도 우리 주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겨서 그분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도록 당신 삶을 통해 그렇게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성탄은 그런 생명의 탄생을, 사랑과 자비로 사람들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다면, 어째서 저희가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단 말입니까?”(판6,13)라는 기드온의 절규와 의문은 단지 분명 기드온만의 울부짖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임하소서 임마누엘이여’라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아직 이 세상은 완성에 이르지 못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탄생과 재림은 바로 이런 세상 안에서 이미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장일순 님의 「좁쌀 한 알」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친구가 똥물에 빠지면 우리는 바깥에 서서 욕을 하거나 비난의 말을 하기 쉽습니다. 대개 다 그렇게 하며 살고 있어요. 그러나 그럴 때 우리는 같이 똥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서, 여기는 냄새가 나니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면 친구도 알아듣습니다. 바깥에 서서 나오라고 하면 안 나옵니다.』하느님은 저 하늘 높은 데서 우리더러 빨리 올라오라고 소리치지 않으시고 똥물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와 모든 것을 함께 나누십니다. 그런 다음 이곳은 냄새가 나니 같이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며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려 지금도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계십니다. 이 하느님이 바로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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