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 마태오 5, 1 – 12

by 이보나 posted Jan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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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구라는 행성에 태어난 것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을 통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온전히 자유롭게, 충만히 행복하게 살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주님을 따르면서 저는 특히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서 ‘참행복 선언’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왔습니다. 이를 통해 제 바람은 어쩌면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5,12)라는 약속을 누리고 싶기 때문이었음을 새삼 강하게 느낍니다. 참행복의 선포와 초대는 바로 삶의 존재 이유는 행복이며, 행복이 삶의 의미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행복이란 『하려고 하는 것을 행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하고 있는 것을 하려고 하는 데 있다.』고 했는데, 이 표현은 결국 행복이 삶의 의미라는 뜻을 강조한 것이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은 「노동 윤리의 침체에 대한 일화」를 통해서 행복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지중해의 어느 항구에서 초라한 행색의 어부가 정오의 햇살을 맞으며 빈둥거리고 누워 있다. 그 옆을 지나가던 관광객이 어부에게 말을 걸면서, 그렇게 누워 있지 말고 차라리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고 타일렀다. ‘왜죠?’하고 어부가 그 이유를 물었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지요!’ 관광객이 대답했다. 그러면서 얼른 관광객은 자신이 생각하는 셈법을 일러 주었다. ‘고기를 더 많이 잡을수록 돈을 더 벌어 부자가 되고, 그러면 많은 고용인도 거느릴 수 있다오.’ 그러자 그 어부는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한다, 말이오?’ 하고 반문했다. 관광객은 다시 설명했다. ‘조용히 등을 기대고 햇살 아래 누워 있으려면 그만큼 부자가 되어야지요?’ 그러자 어부는 ‘내가 바로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오.’하고 대답하고는, 눈을 감고 스르르 잠들었다.』

경험상 행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거나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삶에서 고통과 스트레스, 그리고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어야 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걱정과 근심이 무가치하거나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고 알아듣습니다. 다만 그렇게 근심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 다만 마음의 중심을 바꾸라는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의 삶은 때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루해지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분명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많은 수고, 곧 근심과 걱정 때론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행복은 한순간에 얻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 일생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마음의 가난, 삶의 슬픔, 온유한 마음을 갖고 자비를 베푸는 삶, 의로움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받을 때도 보복과 복수하려는 마음 없이 깨끗한 마음과 평화를 이루는 일은 거저 주어지거나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겪으셨잖아요. 그러기에 이 모든 상황을 직면할 때 현실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려고, 이 모든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하려는 노력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필수 조건이며 과정이라고 봅니다. 이를 위해 긍정적인 사고와 신앙적인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 불행한 날에는, 이 또한 행복한 날처럼 하느님께서 만드셨음을 생각하여라.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인간은 알지 못한다.”(코헬 7,14)고 코헬렛의 저자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니 정말 행복한 것처럼 행동하세요. 그러다 보면 정말 행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토스토에프스키는, 『다 좋은 일이야. 모든 것이,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지. 단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말이야, 그게 다야! 그걸 아는 사람은 금방 행복해질 거야, 그걸 깨닫는 순간에 즉시!』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부정적인 것에 매달리고 집착하는 것일까요? 이 권고를 한 번쯤은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부정적인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알고, 긍정적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때론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웃어 넘겨라!’는 권고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다만 행복 추구가 너무 과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상하지 않은 불행을 맞이해서도 태연하게 처신하는 것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대단한 신앙의 행위입니다. 불행의 순간에도 희망이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곧 행복이 다가오리라는 믿음을 굳게 가져야 합니다.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고통 후에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기도 합니다. 생명의 위기와 어려움이 있어도 치유 받을 은총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이며 성장과 전환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또한 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겪는 어려움도 있지만 극복하고 난 다음에 오는 성취감이나 만족감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프로이트는 행복은 “사랑하고, 일을 할 수 있을 때 찾아온다.”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코헬렛의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나는 알았다. 모든 인간이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하느님의 선물이다.”( 3, 12~13)는 말씀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관념적이거나 이론적인 행복관이 아니라 지상에서 우리가 해왔던 일상의 모든 일이 바로 행복이었음을, 젊은 날이 아닌 노년이 되어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으니 저는 이나마 여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코헬렛은 우리에게 자신의 인생에서 참으로 의미로운 것이 무엇이며,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혹시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렇게 단순해 보이는 코헬렛의 가르침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진정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사를 모두 무시하고 기도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과 사이비 신비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서는 담담하게 ‘먹고 마셔라.’ 하고 말합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뒤 예수님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르 5,43)하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세상을 등지고 마음을 괴롭게 하는 영성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지혜 문헌은 굉장한 치유력으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너희는 모든 선택이 너희에게 맡겨진 존재다. 너희는 몸과 마음이 영이 건강하도록 잘 보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고 충분히 자고 운동도 하고 몸기운도 느껴보아라. 그리고 거절해야 할 때는 과감히 거절하여라. 그래야 자신의 소명을 보호할 수 있다. 세상에 유용한 존재가 되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에게 잘해주라.>고 말입니다. 코헬렛은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인간적인 행복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영위할 줄 아는 성숙한 삶의 기술에 관하여 코헬렛 2장에서 인간적인 행복에 이르는 통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묘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삶을 싫어하게 되었다. 내 마음은 절망하기에 이르렀다.” (2, 17. 20)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1테살로니카 5, 23엔, 인간의 3가지 차원 곧 신체적 차원, 정신적 차원, 영적 차원이 그것입니다. 행복도 동일합니다. 코헬렛의 시각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신체적 행복은 건강입니다. 그러므로 늘 자기 육체적인 컨디션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정신적 행복은 기쁨이며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심, 내주하고 계심을 알고 있어야 하며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행복은 의미입니다. 존재의 의미를 느낄 때만이 영적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코헬렛을 관통하는 공허함, 무의미함, 헛됨은 존재의 의미를 모르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코헬렛의 지혜는 존재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즉 영적 행복이 없다면, 정신적 행복과 신체적 행복이 그 공허함을 채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을 통해 무엇이 실현되어야 하는지 묻지 않으면, 그 사람은 충만한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삶의 학교에서 참된 행복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의 행복에 관하여 이사야서 48, 17절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이렇게 인도받고 있는 우리는 거듭거듭 주님을 찾아야 한다고 스바니야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 모두에게 외칩니다. “주님을 찾아라!”((2, 3) 그러니 마음이 가난하시고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시고 함께 우시는 주님을 찾으십시오. 온유하시고 자비로운 주님을 찾으십시오. 마음이 깨끗하시고 평화이신 주님을 찾으십시오. 의로움 때문에, 하느님 때문에 모욕당하시고 박해당하셨던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분을 찾으면 이 땅에서는 물론 하늘에서도 행복할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먼 훗날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부터 주님과 함께 살며, 주님처럼 살면서 신체적 차원, 정신적 차원, 영적 차원 곧 온 존재로 살 때 행복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행복, 기쁨이며 위안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알렐루야”(복음 환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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