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사순 제1주일: 마태오 4, 1 – 11

by 이보나 posted Feb 2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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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라는 시입니다. 시인이 마음에 둔 ‘그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에게는 33년의 짧은 삶을 사시다 가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시였습니다. 그분의 삶은 참 힘들었지만 화려한 삶을 사신 분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주변에 있었지만 고독한 분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이시라며 환대받았던 분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엔 외롭게 삶을 마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인데, 세월이 흘러도 한참이 흘러 까마득히 옛날 일인데도, 아직도 그분을 잊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잊는 것은 한참, 영영永永 한참’이라는 시인의 노랫말 그대로입니다. 

힘들게 피었다 잠깐의 순간에 저버린, 누구도 쳐다볼 틈 없이 그렇게 쉽게 삶을 마치신 예수님, 그분을 한참 아니 영영 기억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돌을 두고 빵이 되라’고 외치며 살아온 삶이 부끄럽고, ‘모든 권세와 영광을’ 쟁취하기 위해 정신없이 살아온 삶이 부끄러워서입니다. 때론 타인보다 우월한 능력자로 살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온 교만함을 부끄러워한 탓입니다. 그런데 권력-부-능력을 탐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겐 예수님의 삶은 어리석음 그 자체일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어리석은 삶, 바보처럼 사셨던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겠다고 다짐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사순 시기는 그래서 회개와 정화의 시기여야 합니다. 입술로는 회개와 정화를 노래하면서도 몸으로는 빵을 구하고 정신과 마음으로는 권세와 능력을 얻겠다며 발버둥을 치고 살아간다면 이는 곧 예수님을 유혹한 악마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혹받으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예수님마저도 유혹한 악마라면 당연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이렇듯 유혹에는 예외적인 존재가 없습니다. ‘나만 왜 유혹에 시달리는가?’, ‘나는 왜 여태껏 유혹받고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면 오늘 복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마를 물리치셨던 예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유혹은 죄가 아닙니다. 윤리적인 판단 대상이 아니고 유혹은 그저 ‘유혹’일 뿐입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인간이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마태26,41)라고 당부하시고,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26,42)라고 기도하심을 통해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사는 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의 온당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4,3.6)이라는 악마의 말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의 세례 때와 거룩한 변모 때에는 하느님께서 직접,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3,17;17,5)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악마의 유혹은, 예수님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께 충실하신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혹받은 장소는 광야입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광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시험한 장소인 동시에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시험하셨던 장소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악마의 유혹을 받는 장소이며,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살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께 던진 첫 번째 유혹은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4,3)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첫 번째 유혹은 결국 인간의 실존적인 필요조건인 의식주에 대한 유혹입니다. 허나 인간 생존에 가장 기본적이고 필요한 의식주에 대한 유혹이 아니라 분수에 넘친 먹거리와 입을 거리 그리고 잠잘 거리를 탐내는 욕심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단호한 대답은 그것들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존재 이유와 의미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4,4)고 신명기를 인용해서 대답하십니다. 우리는 진정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악마의 두 번째 유혹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4,6)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해 보려는 종교적인 구원 놀이의 유혹입니다. 엉터리 진리, 기복적인 신앙, 값싼 은총, 진정한 자기 투신이 아닌 안락과 일신의 안일을 위한 거짓된 신앙의 유혹입니다. 또한 이 유혹은 주님의 뜻이 아닌 제 뜻에 의한 신앙, 제멋대로 살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자주 우리는 주님과 거래하듯이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4, 7) 우리는 자주 주님을 시험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를 반성해봐야 합니다. 

악마의 세 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경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자신이 모든 삶에 중심이 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가정, 직장, 교회에서 남들이 자신만을 보아주고 인정해 주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경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가치와 사조思潮를 그 중심에 두고 더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유혹에 늘 노출되어 삽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4,10)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경배하며 살고 있는가를 성찰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 때, ‘끊어버리고 믿습니다.’고 고백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서 하느님보다는 재물과 권력에 의지하려는 유혹, 자기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하느님까지도 이용하려는 유혹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듯이 신실한 신앙인 역시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만이 우리의 임금이며 주인이시고, 바로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일편단심으로 하느님께 굳은 신뢰심을 갖고 그분 말씀에 의지할 때, 교묘하고 끈질긴 유혹의 목소리를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빈 구멍을 하나씩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 같은 빈 구멍을 인간들은 역사 이래 권력과 부귀와 영화와 지식 등으로 메꾸어 보려 하였지만, 언제나 삶의 공허함 그리고 인생 무상함을 느끼며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빈 구멍은 하느님으로만 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이 우리 존재의 빈 구멍과 텅빈 영혼을 채워주신다는 믿음, 하느님의 세상과 인간에 대한 구원 의지와 경륜을 시험하지 않고 전적인 신뢰와 의탁, 그리고 삶의 고단한 여정 속에서도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섬김을 통해서 세상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깨닫고, 느끼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악마는 우리에게서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4,11 참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저희를 지켜주시고,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경배하며 섬기며 당신의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가도록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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