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마태오 17, 1 – 9

by 이보나 posted Mar 0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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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제가 살았던 양양 오상 영성원은 깊은 산은 아니지만, 산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설악산이 잘 보입니다. 예전에는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우면 산에 자주 올랐지만 이젠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서 굳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등산을 하신 분들은 산에 오르다 보면 흐트러진 마음을 되잡을 수 있고 뒤엉킨 생각의 실마리가 정리되는 체험을 하셨으리라 봅니다. 복잡한 세상에 얽매여 살다가 한 번쯤 높은 산에 올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내려다본다는 것은, 새로운 시선과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높은 산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밤낮 자기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지만 모든 게 작고 멀리 보이면서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17,1)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에서 ‘산’이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이라고들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산 위의 삶’(17,2-8)과 ‘산 아래의 삶’(17,9)으로 나누어집니다. 산 위의 삶은 예수님의 변모된 모습과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삶이었고, 산 아래의 삶은 예수님의 약속을 실행하는 삶으로 구분됩니다. ‘산’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애졌다.”(17,1~2) 변모되신 예수님의 얼굴과 옷은 이 세상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 속에 빛나는 얼굴이며 모습이었습니다. 아울러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시는”(17,3) 모습은 분명 비현실적인 광경이었으며 신적 영광의 거룩한 순간이었습니다. 마태오는 루카와 달리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대화 내용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와 ‘모세와 엘리야와의 대화 모습’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미구에 있을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암시하고 마음을 준비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느껴집니다.

뜻밖에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를 목격하고 체험한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놀라운 광경과 영광의 빛에 휩싸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예수님께 단지,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17,4)라고 간청합니다. 아마도 이 놀랍고 새로운 체험을 통해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역시 산 아래에서 겪어왔던 혼란과 고단한 삶을 깨끗이 잊게 해주는 체험이었기에 ‘그냥 여기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한평생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법도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다른 생각이었지만 만일 우리 역시도 그런 광경을 목격한다면 동일하게 생각하고 표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을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떼미네.』라는 양희은의 「한계령」의 노랫말처럼 산은 더 이상 산에 머물지 말고 우리가 떠나온 저 속세로 내려가라고 재촉합니다.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혼자만의 평화를 누리고 싶은 갈망이야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실제로 살아야 할 삶(=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와 삶)의 상태는 아니며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의도를 곡해한 베드로와 제자들의 욕심이었다고 봅니다. 나 혼자만의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에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곳에 초막 셋을 지어 눌러앉고 싶은 욕망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데에 온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고 계시지만 베드로는 아직도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예수님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나 혼자만의 평화와 안락을 위한 시선에서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신앙을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수단으로 만드는 일이며 하느님을 자기만족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이기적인 삶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그 순간 자기중심적인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있으며, 부활을 위해 겪어내야 할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만족과 안락 속에 주저앉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가신 길을 함께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위안과 위로는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잘 따라 걷기 위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선물에 마음을 빼앗기며, 선물을 주는 사람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유아적인 신앙을 갖는 사람이라면 어린아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안에 집착하고 평안에 몰두하기 마련입니다. 참된 평화란 어려움을 통해서 주어짐을 잘 모릅니다. 성숙한 신앙인이라 그 사랑에 힘입어 산에서 내려와 그분이 가신 십자가를 향한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고, 십자가 짊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천할 때 그분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17,8) 이런 점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권고하듯이 우리에게도 “사랑하는 그대여,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1,8)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신앙이란’ 보는 것과 듣는 것만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며, 이 셋이 고루 균형을 이루어야만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철부지 같은 저 역시도 짧지 않은 사제와 수도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살아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많은 <들음>과 <봄> 중에 저의 삶을 <행동>으로까지 변화시킨 것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밖엔 없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변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어려움인지는 알지만, 그 변화 속엔 분명 세상에선 맛볼 수 없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이 넘실대고 있음을 알기에,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우리 역시 매일 매주 ‘기도의 높은 산’에 홀로 올라가 ‘하느님의 얼굴을 뵈오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자신이라는 욕망이라는 틀에서, 안주의 틀에서 벗어나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 삶을, 그 길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당신 자애를 베푸실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분명 생명을 얻고 더 얻을 것이며 영원히 그 생명 안에서 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아멘”(3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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