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 요한 14, 15 – 21

by 이보나 posted May 1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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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읽었던 묵상 글의 내용을 잠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인권 변호사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출신 학교나 지역에 현수막을 걸고 축하하는데, 오히려 축하보다는 근조謹弔라고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변호사가 참된 변호사로 살려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무죄를 받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변론할 때 의뢰인과 똑같은 심정과 처지가 되어 의뢰인이 당한 억울함에 이를 갈고 치를 떨 만큼 부정적인 느낌을 공감하고 동감할 때만이 무죄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을 변호하는 양심 있는 변호사가 이럴진대, 우리의 변호자이시며 협력자이신 성령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이 보다 더하지 않겠어요.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변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로8,26)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1베3,16) 살자면, 때론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겪게 되고 그럴 때 나의 처지에서 나를 위해 올바른 변호를 해줄 변호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호자이신 성령은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입장과 처지에 서서 아빠 하느님께 변호해 주실 것임을 희망하며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살아가도록 오늘 복음은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문맥을 다음과 같이 변경해서 읽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14,21) 이를 위해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16~20) 이렇게 읽다 보면 오늘 복음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의 계명(=서로 사랑)을 지키는 것이 똑같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듣고 보고 만져보았기에’ 그 사랑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의미는 단순히 <준수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마음에 새겨 사랑하는 사람의 가르침과 말씀을 기쁘게 실천하겠다는 내적 다짐이며 깊은 신뢰를 담고 있습니다. 결국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랑하는 존재이신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뢰이며 사랑의 충실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떠나가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당신께 대한 사랑보다 당신이 남긴 계명 실천 여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당신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14,21)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계명을 지키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른 보호자> 곧 <진리의 영>을 보내주시어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있도록 하실 것”(14,16)을 약속하십니다. <다른 보호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일차적인 보호자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직접적인 구원자이셨지만 이제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되돌아간다는 관점에서 이 땅에 남아 당신의 계명을 지키려는 우리를 위해 무책임하게 떠나신 것이 아니라 당신 떠난 이후에 우리의 협력자이자 보호자인 성령을 보낼 것임을 약속합니다. 

<다른 보호자>는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머무시며, 진리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진리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요16,13) 성경에서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고,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이 바로 진리이십니다. (14,6)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진리의 영 안에 함께 하시며 성령을 통해 현존하시고 활동하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차원에서 제자들과 더 친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시며 성령의 활동을 통해 당신 자신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 이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제자>는 서로 대척 관계로 분리됩니다. “세상은 성령을 알지 못하지만, 너희는 성령을 알고 있다.”(14,17참조)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여기서 말하는 앎이란 바로 인격적인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사랑의 앎을 말하는 것입니다.(요10장참조) 그러기에 제자들은 다른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알고-받아들여-함께 생활함’으로써 예수님을 좀 더 깊이 알게 되고 알게 되는 만큼 예수님의 계명을 충실히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 체험적으로 깨닫게 될 때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성령의 역동적인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인생은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처럼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고, 이별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헤어짐은 순간이지만 이 순간을 통해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16,7)는 말씀처럼 헤어짐은 영과 진리 안에서 제자들에게 성장을 위한 은총의 시간이고, 부재를 통해서 현존을 더욱 깨닫게 되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영적 성숙의 기회입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14,18)은 사실 예수님의 첫 번째 떠남 곧 죽음을 말한다면, “그날”(14,20)은 죽음 건너편으로 부활을 의미하며 그날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과 영과 진리로 새롭게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14,17) ‘생명의 빛이요 세상의 빛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빛으로 빛을 뵈온다.”는 표현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명의 빛으로 다시 보게 됩니다. 이 부활의 빛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있는’ 것처럼 ‘자신들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자신들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내 안에 너 있고, 너 안에 나 있다.>는 말을 이해한다면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의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는 말씀처럼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다.’ 이 궁극적 상태는 바로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아버지께, 아버지의 집에 도달한 후 성취될 것임을 우리는 희망하고 늘 깨어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희망이며, 이 얼마나 거룩한 믿음입니까? 사랑은 모든 존재를 하나로 만들 것임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행복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사랑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을”(1베3,17)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며 오히려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신”(1베3,18) 예수님처럼 고난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사랑의 실천을 통해 “모든 사람이 우리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13,35)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거룩한 아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의 사랑을 노래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너희는 와서 보아라. 하느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이루신 놀라운 그 위업을!>(시66,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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