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토요일: 마태오 17, 10 – 13

by 이보나 posted Dec 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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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7,12)

오늘 복음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높은 산으로 데려가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되심을 목격하게 한 뒤, 산에서 내려오면서 제자들과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7,10)라는 말씀에 이어, ‘물었다.’로 시작해서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깨달았다.” (17,13) 라는 말씀, 곧 ‘깨달았다.’로 끝납니다. 이는 곧 인간 존재가 그러하듯 인간이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존재인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예수님께 ‘하느님에 대해서나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 무지하기에’ 물어야 할 존재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몰랐던 것을 깨닫는 사람임을 가르쳐 일깨워 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음을 읽을 때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하고 물어야 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주님의 말씀인 복음에서 찾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늘 스스로 ‘무지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물을 때 우리는 좀 더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런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17,11) 고 대답하셨습니다. 숙지해야 할 점은 지난 목요일의 복음에서(11,11-15)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인정하셨고, 말라기 예언자가 특정한 때에 올 것으로 예언한 ‘사자使者’와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임을 증언하십니다. 말라기 예언자는 “보아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3,1), 그리고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3,23) 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그 길을 닦을 주님의 사자가 먼저 올 것이며, 세상 종말에 주님의 심판이 있기 전에 불 마차를 타고 승천했던(2열2,11) 엘리야가 다시 와서 이스라엘의 화해와 재건을 도모할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집회서’에서 ‘벤 시라’는 불 마차를 타고, 불 소용돌이 속에서 하늘로 올라갔던 엘리야가 주님의 심판 날에 다시 와서, 하느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 분노의 불을 끄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하면서, 재림하는 엘리야를 볼 수 있고 그와 사랑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집48,9-11참조) 

제자들의 물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온 엘리야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완수하지 못하고 참수되었기에 재림한 엘리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니 곧 뒤이어 오실 메시아도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사람들은 메시아의 선구자로 온 세례자 요한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고 박해하여 죽였던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님까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고 박해하여 죽일 것이라고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17,12)고 하는데, 왜 사람들은 제멋대로 세례자 요한을 다루었을까요.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편견이나 고정관념 등 여러 이유가 있는 것처럼 ‘제멋대로’ 다룬 이유는 바로 그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의 무지함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에 대해서나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대해서 알지 못한 데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무지함, 하느님의 뜻과 말씀에 대한 우리의 무지함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반해서 자신의 예상과 다르다고 ‘제멋대로’ 사람들을 다루듯 우리 역시도 그렇게 ‘제멋대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의 이런 무지함과 그로 인한 어리석음에 대해서 바오로는 아주 분명하게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로1,19) 그런데 왜 예수님은 사람들의 무지함과 그 어리석음을 아시면서 그렇게 바보처럼 세례자 요한의 헛된 죽음을 방조하시고 당신 역시도 동일한 삶,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7,12)라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제멋대로’ 까불어 대는 그들을 묵인하시고 수용하신 것일까요? 물론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지만, ‘그들이 제멋대로 당신을 다루도록 나둔’ 그 결과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죽임당하셨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도저히 인간의 좁은 식견이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것이 하느님의 관대함이며 사랑이십니다. 이토록 하느님의 사랑은 강요나 구속이 아닌 당신 사랑을 거부할 자유와 심지어 ‘제멋대로 다루었다.’가 의미하듯이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나누시고 바라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오만이며 무지함에 따른 죄입니다. 하느님의 뜻 보다 자기의 뜻 곧 ‘제멋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만 하려고 하는 인간의 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제멋대로’ 말하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을 바로잡을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 그리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살려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 세상이며, 이런 존재가 되고 이런 삶을 바로 누가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고 봅니다. “하느님, 저희를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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