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금요일: 마르코 2, 1 - 12

by 이보나 posted Jan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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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2,10~11)

인생을 살면서 우리 자신이 예상하지 않은 재난의 희생자가 되거나, 심한 중병을 앓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함께 걱정해 줄 사람이 있다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수많은 사람, 들것에 실려 온 중풍 병자와 그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이웃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의심하고 판단하고 있는 율법 학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부류의 사람으로 예수님 곁에 서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율법 교사가 아닌 동료를 예수님께 인도한 네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자기의 이웃인 중풍 병자를 무척 힘들게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풍 병은 단지 신체적인 편마비도 문제이긴 하겠지만, 오히려 자신이 겪고 있는 편마비를 수용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체념하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혼란과 방황이 더 큰 압박이라고 봅니다. 영혼의 상태가 육체적 마비의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그런 편마비로 장애를 겪는 사람은 오히려 그런 상태에 머물고 싶은데 그 까닭은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질병에 대한 체념과 포기에서 도피하려는 심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료들이 마비된 사람을 설득해서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까지 하는 까닭은 건강하던 이웃이 중풍으로 몸도 마음도 무너져 버린 상태로 절망하고 체념하는 모습을 보기가 너무 애처롭고 측은한 마음에서 예전의 건강했던 상태로 되돌려 주고 싶은 원의가 강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자책하며 삶을 비관하는 동료의 투정하는 소리와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픈 이웃에 대한 순수한 마음 곧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예수님과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믿음에서 과감히 그렇게 실행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6,2)라는 말씀대로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에 친구를 어렵게 데리고 왔지만,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기에” (2,2)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중풍 병자인 친구를 예수님의 눈에 띄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한 결과 네 사람은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동료를 들것에 달아내려 보냈던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는 말처럼 동료를 돕고자 하는 선하고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에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따질 겨를도 없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들의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내가 만일 마비되어 치유 받을 수 있는 곳까지 인도해 줄 친구들이, 이런 사람들이 내게도 있는가, 그리고 나는 중풍 병으로 아파하는 동료들을 예수께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하게 하는 행동이며 모습입니다. 당대의 팔레스티나의 가옥 구조는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제는 바로 그들의 파격적인 생각과 실행이 큰 감동이 됩니다. 어쩌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사람들의 장벽처럼 우리 앞에 때론 그런 많은 어려움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다만 저는 다행스럽게도 나의 도움과 동행이 필요한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행복합니다. 

이런 동료들의 놀라운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5)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율법 학자들은 물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놀랍니다. 왜냐하면 중풍 병자는 예수님께 죄의 용서를 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곧 죄와 마비와의 관련성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이를 예수님께서는 이미 파악하고 계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당대 모든 사람은 인과응보 곧 과거의 죄가 현재의 육적인 모든 질병의 원인이다, 는 점을 알고 믿고 있었습니다. 죄는 우리의 삶을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의 죄의 용서를 선언하였고, 육신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중풍 병자는 자신 안에 갇혀 살아왔고, 자신의 내적 문제와 갈등 속에 도피하고 회피하였기에 그런 갈등이 육신의 마비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치료 이전에 먼저 그의 마비 원인인 죄의 용서를 베풀면서 그 자신의 내적 치유와 구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 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2,11) 물론 그 중풍 병자는 사실 자신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즉각적으로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2,12)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또 이것은 생명의 말씀인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결국 중풍 병자가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동료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네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 들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간 중풍 병자의 믿음과 치유의 능력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 낸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입니다. 사실 그 자리에 참으로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를 체험하고 은총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동료를 데려간 이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일어난 중풍 병자는 충만한 은총의 기쁨과 하느님의 놀라우신 현존을 체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네 사람과 치유 받은 사람들은 믿음을 가졌기에 그 자리에서 하느님 자비의 안식처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2,12) 는 표현에 드러난 놀라운 중풍 병자의 치유는 예수님 홀로 빚은 치유 기적이 아니라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의 측은지심과 함께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신뢰와 믿음이 이루어 낸 일이었기에 새삼 더 하느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은총은 바로 만남이며 소통이고 치유이며 기적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판단하고 방관하는 사람이 없이, 우리 모두 저들처럼, 우리 이웃의 고통받는 이들을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께 데리고 함께 나아갑시다. 아멘. (복음 환호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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